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품절


미국 영화가 자꾸만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지적 힘이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자기 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선전해야만 안심이 되는 나라는 이미 그렇게 좋은 나라가 아니다. 자기 나라가 좋지 않은 나라라고 비판하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 그것을 수용하는 나라가 차라리 좋은 나라이다. 그 체제를 나는 부정적 신학이라는 용어를 차용하여 부정적 체제라고 부르고 싶다.-47쪽

한국 사회는, 소외/물신화/기능화 등의 후기 산업 사회의 특징을 그러난 구조로 갖고 있으며(나는 나 아닌 것이다), 분단/군사 독재 등의 후진국 경제 정치적 특성을 숨은 구조로 갖고 있다(나는 나 아닌 것이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내가 나 아닌 것이어야 안심하고 살 수 있다. 나는 사유하지 않는다...... 나는 사유하지 않는다. -55쪽

구멍의 공에 제일 깊게 사유한 최초의 인물은 노자이다. 그는 항아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항아리의 텅 빈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빈 곳이 있어야 채울 마음이 생겨난다. 공은 행위, 욕망의 행위의 밑바닥이다. 장자는 그것을 더 논리화해서, 구멍을 뚫으면 혼돈은 죽는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뒤집으면, 구멍이 있으면 혼돈은 없다. 그 구멍은 질서, 사회 생활의 기본틀이다. 구멍이 없는 존재는 완전자 - 신, 악마, 자연...... - 뿐이다. 구멍이 있는 것은 모두 인간적이다. 인간은 구멍의 모음이다. 채워도 채워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구멍들......-71쪽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정음사, 1968)의 가장 끔찍한 전언은 맨 앞 대목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 그 동물은 체념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불편하고 더러운 것, 비인간적인 것에 익숙해진 인간의 모습은 더러운 것인가, 안 더러운 것인가?-71쪽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도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 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누구처럼 되겠다가 아니면, 내가 왜 그렇게 돼가 된다. 그 마음가짐은 그의 이름붙이기 힘든 욕망을 달래고, 거기에 일시적인 이름을 붙이게 한다. 왜 일시적인가 하면, 전범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79쪽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 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이 없이는 느낄 수 없다. -168쪽

욕망은 단순한 개인 심리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정치적 개념이기도 하다. 욕망은 현실 원칙에 의해 억눌리고, 그러면 억압이 생겨난다. 그 억압의 상징이 아버지이다. 아버지에게 억눌린 아들은 결핍의 상태로 그 욕망을 산다. 그 결핍이 욕망을 변형시키고 왜곡시킨다. 욕망의 뿌리는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이면서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정치적 욕망이다. 살부 의식은 제임슨이 말하는 "현실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불만"이다. -190쪽

죽는다는 것은 사회적 관련하에서 죽는다는 뜻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 그 가장 극단적인 예가 로빈슨이겠지만 - 죽지 않는다. 그는 사라져 없어질 뿐이다. 죽는다는 것은 남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으나, 육체적으로는 접촉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질 때, 다시 말해 혼자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사라진다. 어디로? 무 속으로. 무마저도 없는 무 속으로. -190쪽

가장 서글픈 사실 중의 하나는, 사람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계속 밥을 먹을 수도 없으며, 또 여덟 시간씩 술을 마실 수도 없으며 섹스를 할 수도 없지요. 여덟 시간씩 할 수 있는 일이란 일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이지요. - 포크너-?쪽

정치적 언어의 특징은 그 뻔뻔함에 있다. -?쪽

열정이란 재능을 가리킵니다. 열정없는 재능이란 없지요. - 김윤식-?쪽

생각이란 벼룩 새끼들 같아서 헤아릴 수가 없다. - 러시아 속담-?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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