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대니 보일 특유의 황금빛 화면이 펼쳐지고 야구를 한다며 쫓아오는 경비원을 피해 인도의 궁핍한 골목을 달리는 아이 둘의 뒤를 카메라가 정신없이 따라가는 초반 10분에서는 인도가 보여주는 가난을 압도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형형색색의 옷들이 펄럭이고 새까만 아이들이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맨발로 거리를 달릴 때 이 영화에 매료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퀴즈쇼가 진행되고 클라이막스로 향해 갈수록 그 마력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 자말과 살림의 행복했던 시절들 사이 사이로 자말이 경찰에게 고문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말은 퀴즈쇼에서 사기를 쳤다는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가 문제를 맞힌 것은 과연 운명인지 사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운이 좋았을 뿐인 것인지를 보여주는 식의 구성이다. 모르긴 몰라도 원작 소설은 영화처럼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구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 순서대로 흘러갔다면 평작이 됐을 법한 작품을 자말이 조사받는 것을 현재로 놓고 퀴즈쇼 녹화 장면을 보면서 문제 마다 어떻게 그 문제를 맞힐 수 있었는지 과거의 일을 가져와 보여주는 식으로 재구성하여 극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클라이막스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추진력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성이나 촬영, 인도라는 독특한 배경이 주는 강렬함이 아니라면 영화의 알맹이 자체는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인 특유의 운명론과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낙천성은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나 다름 없다. 자말과 살림이 앵벌이 조직에 들어가서 라티카를 구하지 못하고 도망친 후 라티카를 찾아 헤매다가 눈이 먼 옛 친구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친구는 미안해하는 자말에게 말한다. '이건 나의 운명이다' 한 줄이면 설명 끝나는 인생이라니, 이들은 정말 운명을 받아들이고 수긍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걸까? 자말이 퀴즈를 맞추는 과정 자체도 어떤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 개입한다. 그리고 더 아이러니한 것은 자말의 궁핍한 삶이 그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인도와는 상관도 없는 영국 감독이 만든, 꽤나 인도스런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의 결말이 표현해주는 인도스러움에 박수를 보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극찬들이 상당히 서구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말의 형 살림은 조폭 세계로 들어가 나름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라티카는 인도의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여기 저기 팔려다니다가 역시나 조폭의 여자가 되어 힘겹게 살아간다. 자말은 라티카를 찾기 위해 퀴즈쇼에 도전한다. 자말과 살림 형제가 보여주는 상반된 삶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할렘을 배경으로 한 여타 미국 영화의 설정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거다. 자말은 인도인이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결국 역경을 발판 삼아 도약하면 성공한다는 흔하디 흔한 영웅담과 뭐가 다르냐는 거다. 그가 보여주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세계를 '당연스레' 짓밟는 살림이나 조폭 두목 캐릭터 역시 복잡다단한 인물로 표현되기 보다는 자말의 순수함을 돋보이기 위한 장치로만 존재한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살림의 변화는 다소 의아하며 조폭 두목 역시 해피엔딩에 일조하는 반대 세력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꽤 큰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는 바로 퀴즈쇼의 사회자다. 그가 자말에게 보여주는 '네가지 없는' 태도는 브루조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대할 때의 거만함,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여 극의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그의 심술에도 이유가 없듯 자말을 조사했던 형사의 아량에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아쉬운 면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라니. 결국 형사 역시 자말의 해피엔딩을 위해 논리를 포기하고 물러선 것이었다.

얼핏 봤을 때는 영화의 결말이 상당히 로맨틱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우연(혹은 운명-_-)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해피엔딩이라니. 대체 백마 탄 왕자 만나고 일도 잘 풀리는 식의 로맨틱 코메디의 결말과 뭐가 다른건지 잘 모르겠다. 인도라는 거? 그리고 진짜 심하게, 완전 충격적으로 가난했다는 거? 인도의 슬럼독은 결국 하늘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사랑과 부를 잡을 수 없다는 건지 뭔지... 그래서 이 해피엔딩에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뭔지... 자말의 성공이 희망이라면 그거야말로 희망없는 사회가 아니냐는 말이다. 이거 은근 인도의 안티가 아니냔 얘기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에너지가 행복한 결말로 인한 불편함을 누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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