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거리에 나와 집결하여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는 일은 더 이상 윤리적이지 않다. 거리의 집회에서 삶의 활력을 찾고, 내가 파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일부가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찰 수 있는 시절은 당분간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거리의 정치가 극도로 위축된 지금 가능한 정치적 참여의 방법을 생각하기 위해 고려시대 문인 권적(權適)이 쓴<지리산수정사기(智異山水精寺記)〉를 읽는다. 그 옛글은 이렇게시작된다. "고독을 즐기고, 식고 마른 심신으로 해탈의 방법이나찾으며, 나만 구제하면 그만이지 남이 무슨 상관이랴라고 말하는 것. 그건 자기 개인에게야 좋겠지만 위대한 것은 어니다. …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좋은 길을 얻는 것은 위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