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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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바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그 앞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그러고 있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이 예술을 만들어낸 지나간 사람들을 생각할까?아니면 그 사진이 찍히거나 그려졌을 과거의 어떤 순간을 상상해 볼까그것도 아니면 그 작품 속에 정지해 있는 시간 그 자체를 관조 하는 것인가먼로의 14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온통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줄곧 그녀가 그려 오는 순간과 시간에 대한 은유무엇보다 우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스쳐지나가는 일상에 대한 진득한 시선은 미술관에서 하나의 그림만을 뚫어지게 보는 관객의 모습을 연상 시켰다그렇다그녀의 글들은 찰나의 순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스냅사진 같다거리를 지나가다 문득 시선을 사로잡는 향수 모델의 파란 눈처럼격렬하면서도 차분한 기품을 담고 있는 그런 묘한 맛이 있다.

 

누군가와 마주 서 대화 할 때 주고받는 온갖 종류의 미세한 감정들살면서 문득 내 안의 심연을 엿 보았을 때의 그 당혹감누구나 겪을 수 있는 순간 속 다양한 강점들을 명확하면서도 때론 모호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이 놀랍다그래서 작가 자신의 바람대로 이 작품은 단편의 형식을 뛰어넘어 그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힘으로서 존재한다사소한 만남과 지나간 시간에 대해 의식의 흐름으로 이루어지던 평범한 텍스트가 이내 범죄 스릴러의 긴장감과 긴 역사 소설의 결말에서나 느껴지는 삶에 대한 회한에 까지 도달한다그래서 다음 단편으로 넘어갈 때 마다 각 작품만의 뚜렷한 잔상을 남긴다마치 영화 한편을 극장에서 막 보고 나온 뒤 매표서 가판대에 전시된 팸플릿을 구경할 때처럼방금 보았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이러한 경험은 주로 역동적인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대하소설에서 많이 경험했었는데이렇게 단편 아닌 단편으로서장편과 단편을 넘어선 또 하나의 장르로서 박진감 넘치게 읽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진실로 이번 노벨 문학상의 심사평이 왜 그렇게 짧고 간결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단편 문학의 거장만이 아니다이 시대 최고의 시간 학자이기도 하다작가는 시간 속에 담긴 인간의 의식 성장과 그에 동반되는 감정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세밀하고 진지하게 보여준다.유년시절에 가졌던 근원적 공포와 상처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변형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사랑의 흐름매일 걷던 거리에 존재하는 사소한 풍경 속에 투영된 우리의 자의식 등 도저히 인간의 언어 그 자체로는 표현하기 힘든 근원적인 것들을 눈앞에 필름을 펼쳐 주듯이 찬찬히 보여준다.

 

그 필름 속의 풍경들은 또렷하고 명확하진 않지만 분명한 감정의 색들로 채색되어 있다우리가 좀 더 그 순간에 동화되고 공감할 수 있도록더 나아가 자기 안의 봉인된 시간을 현재로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말이다그 기억은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다른 예술 작품으로부터 기인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럴 땐 청춘이 대려 불리하다지금의 시간으로부터 열 번을 뒤로 감겨봐야 이제 막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엄마가 땋아 준 양 갈래 머리를 한 아이였으니마땅히 이 책에서 보여준 감정들의 면면을 경험한 순간이 전무하다그래서 만약 내가 10년을 더 나이 든 상태에서 이 책이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운명처럼 다가 온 스페인 영화와 함께 이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이 책의 초판본이 발간된 12월 초. ‘일본에 가닿기를에서 마주한 사랑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영화를 보았다제목은 ‘El Secreto De Sus Ojos’ (비밀의 눈동자-2010) . 70년대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자신의 상관을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강간살인을 당한 아내로 인해 인생을 범인에 대한 복수로 보내는 남편과 그 사건의 범인을 쫒는데 평생을 바친 주인공 그래서 놓쳐버린 그녀.

 

두 사람의 사랑.

 

나는 영화 보는 내내 그 사랑을 생각했다그리고 이 작품을 보는 내내 공인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면 살아 숨 쉬는 순간의 특별함이 숨 막히는 적막감으로 탈바꿈한다처음에는 익숙해서 좋았던 그 사람이 어느새 따분해 지는 것처럼 말이다아직은 삶을 자극해 줄 정열이 필요한데아니 삶이 계속되기 위해선 지금 필요한데 항상 같은 장소 같은 사람 같은 일상에 놓여있다면기꺼이 새로운 열정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그래서 그레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아이의 보호자로서 기차에 탔지만 그 본분을 잊고 낯선 남자와 일탈을 실행한다그 사이에 딸이 사라진 것도 모른 채 그 순간의 열정에 온 몸을 맡기고 만다그것이 탐닉적인 죄였다는 것을보호해야 할 책임 있는 아이에게 소홀했다는 원죄를 짓는 것이라 해도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열정이다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로맨스일 지도 모르지 않은가그래서 어느 정도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그 남자에게 손목을 붙잡혔을 때 그녀의 당혹감과 결국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미련을 연민했다.

 

그리고 여기 추악한 열정을 가졌던 이가 있다한 여자를 오랫동안 짝사랑만 해오다 결국 강간 살해를 저지르고 비열하게 살아남은 살인범습관 같았던 성숙하지 못한 열정이 불러 온 파국그로인해 망가진 여러 사람들의 삶은 보상할 길이 없다그래서 그의 열정은 용서받질 못할 열정이다그 열정으로 한 사람이 가진 하나의 세계는 파괴됐다동시에 그녀가 존재함으로서 실재했던 그의 사랑 또한.

 

그리고 25년 뒤당시 특수한 정치적 상황으로 살인범이 가석방 된 뒤 그 사건을 잊지 못한 벤자민은 퇴직 후 그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그가 그 과거를 들춰내 글로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과거와 현재는 혼재되고 그의 시간은 자신이 놓치고 온 순간들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소설의 아이디어를 골몰하다 메모지에 적은 낙서 하나.

 

te mos(나는 두렵다)

 

한참을 메모지를 쳐다보던 그는 결국 글자 중간에 에이자 하나를 써넣는다.

 

te amos( 그대를 사랑합니다.)

 

만년필 잡은 그의 손이 떨리던 순간잠깐의 정막.

침대에서 일어나 겉옷을 입고 나가는  담대한 뒷모습.

거침없는 발소리에서 느껴지는  단호함.

잠시 문고리를 잡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몸짓에 스며들어 있던 벅찬 설렘.

 

그렇게 25년 뒤에야이레네.

그녀의 집무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간 벤자민.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어 뛰어 들어 온 그를 바라보는 그녀.

 

그 장면은 자갈에서 언니의 죽음 후 오랜 시간 뒤에 화자가 계부인 닐과 대면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그는 이제 그만 동생을 살리지 못한 죄의식에서 나오라고 충고한다행복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현명하다고네가 좀 더 빨리 정신을 차려서 집으로 달려왔어도 결과는 똑같을 거라고 말이다이제 그녀도 그 일이 자신의 탓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일어난 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때의 기억을 영원히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벤자민이 종결하지 못했던 그 사건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었던 것처럼결국아내를 잃고 분노 속에 살던 남편의 살기 어린 눈동자는 그의 가슴 속에 상처로 남아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하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그 안에서 걸어 나와야만 했다.

 

결국단 한 순간의 용기로 25년의 세월을 넘어 비로소 그녀 앞에 섰다이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서벌컥 문을 열고 들어 온 그를 당황한 듯 올려다보는 그녀그 혼란스러운 눈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그의 눈동자그 속에 담긴 아름다운 사랑의 열정이내 그녀는 미소 짓는다.

 

앞으로 많이 복잡해질 거예요.”

 

알아요잘 알아요.”

 

그 마지막 대사로 닫히는 사무실 문그렇게 다시 시작된 삶.

 

디얼 라이프의 마지막처럼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언제나 그런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용서 했다.

그녀 또한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을 과거와 함께 가둬둔 그를 용서한다.

 

이렇듯 삶은 언제나 그 순간에는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 같다단 하나의 알파벳으로 단어의 뜻이 완전히 뒤바뀐 것처럼삶을 이루는 퍼즐 조각의 모양은 예측할 수도 마음대로 고를 수도 없다그러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시간의 미학은 그래서 특별하다언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작은 단서가 새로운 시간으로 이끌어 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삶은 내가 스쳐간 모든 시간들로부터 독립하고 용서하는 긍정의 과정이다내가 놓친 기회들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주었을 상처들그러니 만약이라는 미련에서 오는 내 자신에 대한 지독한 경멸 등 그 모든 것들은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긍정하고 받아들임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니 말이다결과적으로 삶의 심연을 봐 버린 작가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비밀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되 그 후에 모든 것은 받아들이라는 단순한 명제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강머리 앤에서 앤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른들 말씀이 원래 세상사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거래요.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명작은 시공간을 초월해 통하는 면이 있나보다. ^---^

 

p.s:작가님 제발 은퇴설 좀 번복해 주세요ㅠㅠ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작 나올 때는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직접 작품에 대한 의견을 팬 래터로 보내고 싶어요. 영원히 애정 합니다 작가님 우후훗 ㅋㅋ

제가 제일 사랑하는 제인 오스틴만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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