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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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이란

좋은 일이면 끝나는 거고

끝나면 좋은 거란 말이오.

-홍루몽-

 

삶이 동화가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른다운 어른도, 아이다운 아이도 없는 곳서 끝없는 탈출을 꿈꿨다. 언젠가는 곧 구원 받기를, 숨 쉬는 것마저 수치라고 생각하는 이런 재투성이라도 고귀한 면을 발견해줄 사람 있겠지. 그런 어수룩한 희망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운명과 분노, 눈먼 선택들, 다시 돌아간대도 시간의 지층아래 치밀하게 깔린 신의 의중만은 헤아려 볼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그 이가 그토록 분노에 차서 씹어 먹을 듯이 나를 본다. 극악무도한 이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제 그런 사랑은 믿지 않는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과 흘러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그토록 오래오래 헤아려본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토록 깊은 우물가에 비치는 심연을 그녀만큼 문장 하나하나 심을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열편의 다른 듯 같은 이야기는 꿈꾸듯 깨어버린 태초부터 받아들일 수 없던 슬픔을 이야기한다. 잘못된 자리에 잘못 끼어든 삶에 대한 수치심과 강박, 언젠가부터 숨 쉬는 것조차 참아줄 수 없는 이의 목을 밟고 서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 시간이 있다. 이제 그 오만한 신이 남긴 상처가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물어버린 상처뿐, 언제나 삶이 최종적으로 준비해 놓은 것은 사랑이나 행복 같은 게 아니라, 거대한 상실과 애도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대려 그래서 숨이 쉬어진다. 이미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서서 기꺼이 자리를 지키는 굳건한 사람, 앨리스와 로즈. 그렇게 영웅이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서 시간 앞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헤아려본 슬픔이 된다. 기어이 온 몸에 시간의 독이 완전히 퍼지지는 않게 한다. 마치 백신처럼, 서로가 서로의 면역이 되어 이 무대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서로를 헤아린다. 그러니 예술이 삶을 구원한다는 말은 다름 아닌 사실이겠지. 바로 이 헤아려 본 슬픔 때문에 이제는 안다.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영원히 우리를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Julian Barnes | Julian Patrick Barnes (194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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