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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경호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서영은 자신의 존재가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가전제품처럼 느껴졌다. 불빛 한 점 없는 그 캄캄한 단절의 느낌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생활 전체를 마비 시킨다는 점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p 22
인수도 알고 있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살의도, 내면의 악마도, 타는 듯한 분노도 모두 사랑이라는 것을. 거절당한 사랑, 속임당한 사랑, 엎어진 사랑, 외면할 수 없는 사랑..... 그것들이 서로 부대끼고 덜그럭거리면서 상반된 감정을 퍼올리고 있다는 것을.
p 56
인수도 알고 있었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본성을 억압하는 제도를 만들어놓고 그 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행위도 우습다는 것을. 이왕 약속된 제도라면 되도록 지키는 게 낫겠지만 어떤 불가항력이나 천재지변에 의해 그 규칙을 어기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패륜이나 악덕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p118
그들도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병실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을 떠올리는 일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상실감이나 열패감, 혹은 자기 비하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를 보며 나무구나.....바다를 보며 바다구나.....말하듯이 그들도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싶었다. 그들도 그렇게 사랑했겠구나......
p142
- 이 책을 읽는동안 마치 내 눈앞에서 이들이 숨쉬고 울고, 웃고, 말하고 있는것 같은 생동감 넘치는 감정표현과 문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그들의 치명적인 사랑을 통해 잠시동안이나마 나도 그들의 사랑의 속삭임에 묻혀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내게 묻고 싶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