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회사를 사로잡다 - '잘나가는' 샐러리우먼만 아는 11가지 매혹의 기술
로빈 월래너 지음, 김미정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여자들 뿐 아니라 남자들이 읽어도 괜찮은 책.

주변 여성 동료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여자 친구에게 선물해도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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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대산세계문학총서 6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이규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문화와 언어의 배경이 다른 시인의 작품을 읽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언어를 교묘하게 다루는 데에 능숙하고, 설화와 신화, 여러 전설을 바탕으로 수많은 상징을 이끌어 내는 데에 능숙한 아폴리네르의 시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마침내 너는 옛 세계에 싫증이 났다'로 시작하는 [누항(陋巷)]은 예고 없이 등장하는 '나'라는 존재, '소년시절' '지금' '오늘' 등 불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너'라는 존재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는 시행들로 인해 아폴리네르의 시에 접근하는 데에 기독교적이고 상징적인 의미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깊이 있는 감상을 어렵게 한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설명해주는 '소년 시절', '지금', '오늘' 등은 특정한 시간에 일어난 일임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연속적인 시간의 속성을 거부하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무는 초현실적인 느낌이 강하다.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너'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중국에서 날아오는 새들이 의미하는 바도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기보다는 경계를 허물고 거리를 지워버리는 느낌을 준다.

아폴리네르가 당시의 전위적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으며 그의 이름이 시인보다 예술평론가로 먼저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전기적 사실과, 앞서 살펴본 [누항]의 난해함, 초현실적인 느낌을 연관시켜보면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시에 회화적인 특성을 부여하려는, 즉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평면 위에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누항]에서 '너'가 거치는 도시들의 공간과 그 여정에 걸린 시간, 과거의 사건과 현재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 태초, 중세, 현재가 혼재하는 혼란은 질서 있게 영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평면 위에 인화된 후 언어의 연금술을 통해 입체화된다. 아폴리네르는 기억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기억은 시간성에 대한 긍극적인 저항이기 때문이다. [누항]에서는 여자의 배에 남은 상처에 엄청난 연민을 느끼고, [죽은 자들의 집]에서는 '누구라도 살아갈 힘을 얻는' 곳, 해가 뜨기 전에 먼저 빛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나아가 미래는 항상 불안하며 오직 과거만이 찬란할 뿐이라는 인식에 이른다. 널리 알려진 [미라보 다리]에서도 그의 시에서 보이는 회화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다리 난간에 턱을 괴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회화적 이미지는 반복되는 연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앞 연들에 의해 입체화된다. 순서대로 살펴보자면 첫 번 째 반복은 환희에 찼던 과거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 그리고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 두 번 째 반복은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영원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느끼는 불안함, 세 번 째 반복은 절망적인 감정, 네 번 째 반복은 실연에 대한 확인 후에도 남아 있는 미련을 환기한다. 평면적인 풍경이 '일어나' 읽는 이와 교감하게 만드는 것은, 나아가 읽는 이를 센 강 위의 미라보 다리로 이끄는 것은 이 반복되는 구절이 앞 연과 작용하여 만들어 내는 마술적인 힘, 즉 언어의 연금술이다.

[메를랭과 노파], [언덕]에서도 시공간이 혼재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메를랭과 노파]에서 수음을 통해 연인과의 사랑의 순간으로 이동하는 것, 완전무결한 기억인지 환상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환각의 순간에 들리는 연인의 목소리, 백년 전부터 불러주기를 소망했다는 말은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가 뒤섞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얻은 지혜와 자신의 시에 대한 예찬으로 옮아간다. '사랑의 실패에서 얻은 기억의 아들'은 바로 자신의 작품을 의미한다. 아폴리네르는 이 시에서 자신의 작품을 '정말로 내 아들', '이마가 불의 후광으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형상화시킨다. 전설에 따르면 메를랭은 자신이 사랑한 비비안에게 산 채로 매장당하는 운명이다. 그러나 그의 인식은 고통의 봄은 때가 되면 항상 자신을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어지럼증으로 표현된 자신의 콤플렉스가 사실은 자신의 시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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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인간 세계사 시인선 101
최승호 지음 / 세계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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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는 죽음을 볼 수 없다.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주검이지 죽음이 아니다. 육체의 눈은 체험한다. 그러나 분석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시각은 일차적이고 예민한 감각이지만 몸이라는 물질세계의 깊이는 너무도 얕고 한계가 있다. 죽음을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눈이다. 마음의 눈은 살아서 파닥거리는 생명에게서도 죽음을 본다.

최승호의 시집 <모래인간>은 죽음에 관한 정물화 전시회를 보는 듯 하다. 한편한편의 시는 죽음에 대한 정밀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다양한 죽음이 있다. 죽음이 죽음다워지는 것은 그 이면에 삶이 작용하고 있을 때이다. 최승호 시인에게 삶은 정지하고 죽음은 움직인다. 그에게는 죽음으로 향하는 역동성이 삶을 의미있게 하는 힘이 된다. 물론 죽음을 꼭 죽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주검에서만 죽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그가 보는 것은 그의 주변에서 넘쳐나는 죽음이다.

그의 시에서는 인간이 전면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사물과 함께 어울려 있다. 시 속에 나타나는 인간이 사물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그의 시속에 나타나는 인간은 세계를 분석하고 개척하지도, 비극적 상황에 절망하지도 않는, 사물과 다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시 속에 등장하는 인간에게 부여한 의미는 모래에서 태어나 모래로 사라지는 순환고리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주변의 사물과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로 그리지는 않는다. 삶에 유익한 아무것도 스스로 생산해내지 못하는 인간, 죽음에 일러서야 파괴를 멈추는 인간, 최승호 시인은 파괴적 삶의 죄와 그 책임으로 죽음 이외의 해결책이 없는 운명으로 인간을 그리고 있다.

타일, 사진기, 시계들, 수족관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최승호 시인이 주로 취하는 소재는 일상적인 사물들이다. 그는 일상적 사물들에게서 얻은 시각적인 정보를 그가 생각하는 세계의 원리인 죽음 안에 끌어들인다. 물건이 닳아 없어지는 것처럼 생명을 가진 것도 닳아 없어지고, 없어져야만 하는 것. 이것이 죽음의 원리다. '6분이면 죽는 것, 하루면 죽는 것, 그리고 아주 오래 살아 60년쯤이면 죽는 것. 죽음이 한계다.-중략-자아가 한계다. 자아를 뚫지 못하고 자아의 감옥 속에서 죽는다.'('피', 부분) 사물은 이처럼 자아의 한계를 뚫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최승호 시인의 시에서 대상에 안타까운 심정이나 찬양은 없다. 감정을 배제한 시선과 고발이나 묘사에 가까운 표현은 그가 현실의 세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모래인간>에서 그가 일말의 동경과 절제된 찬양을 보이는 대상은 오직 물뿐이다.

무한히 생성되고, 스스로 형태를 갖추지 않으며, 낮은 곳으로 흐르고, 죽음과도 하나가 되는 투명한 물의 성질은 그가 여타의 사물이 지닌 어떠한 면을 부각시키려 하는지에 대한 열쇠이다. '지붕들'에서 스스로 어두운 영혼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는 어둡지 않은 도시의 밤을 둘러본다. 역행하는 것, 물에서 사투 끝에 끌려나와 도시의 욕조 속에서 죽는 물고기, 죽은 사람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달걀의 죽음을 알리는 모래시계, 죽음의 처녀막을 인위적으로 찢는 모든 것을 최승호 시인은 경계한다.

시적 대상과 비판적 거리를 둔 최승호 시인의 시선은 '불'이라는 시에서 죽음 이후에 얻어지거나, 죽음 이후에도 남는 '참 맑은 눈알들, 시력은 제로, 시선은 無限'이라는 표현으로 설명된다. 사물의 외곽선이나 명암, 색 따위에 구속받지 않고 배후에 있는 중요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心眼을 제시한다. 마음의 눈이야 말로 온 우주가 불타서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 유일하게 남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판적 거리가 부정적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의 밝음과 어두움, 팽팽하고 주름진 면 모두를 다 보려는 성실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자신의 위치를 글쓰기 어려운 사막으로 유배시키는 고통을 통해 얻어진 心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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