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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6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이규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문화와 언어의 배경이 다른 시인의 작품을 읽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언어를 교묘하게 다루는 데에 능숙하고, 설화와 신화, 여러 전설을 바탕으로 수많은 상징을 이끌어 내는 데에 능숙한 아폴리네르의 시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마침내 너는 옛 세계에 싫증이 났다'로 시작하는 [누항(陋巷)]은 예고 없이 등장하는 '나'라는 존재, '소년시절' '지금' '오늘' 등 불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너'라는 존재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는 시행들로 인해 아폴리네르의 시에 접근하는 데에 기독교적이고 상징적인 의미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깊이 있는 감상을 어렵게 한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설명해주는 '소년 시절', '지금', '오늘' 등은 특정한 시간에 일어난 일임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연속적인 시간의 속성을 거부하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무는 초현실적인 느낌이 강하다.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너'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중국에서 날아오는 새들이 의미하는 바도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기보다는 경계를 허물고 거리를 지워버리는 느낌을 준다.
아폴리네르가 당시의 전위적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으며 그의 이름이 시인보다 예술평론가로 먼저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전기적 사실과, 앞서 살펴본 [누항]의 난해함, 초현실적인 느낌을 연관시켜보면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시에 회화적인 특성을 부여하려는, 즉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평면 위에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누항]에서 '너'가 거치는 도시들의 공간과 그 여정에 걸린 시간, 과거의 사건과 현재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 태초, 중세, 현재가 혼재하는 혼란은 질서 있게 영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평면 위에 인화된 후 언어의 연금술을 통해 입체화된다. 아폴리네르는 기억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기억은 시간성에 대한 긍극적인 저항이기 때문이다. [누항]에서는 여자의 배에 남은 상처에 엄청난 연민을 느끼고, [죽은 자들의 집]에서는 '누구라도 살아갈 힘을 얻는' 곳, 해가 뜨기 전에 먼저 빛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나아가 미래는 항상 불안하며 오직 과거만이 찬란할 뿐이라는 인식에 이른다. 널리 알려진 [미라보 다리]에서도 그의 시에서 보이는 회화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다리 난간에 턱을 괴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회화적 이미지는 반복되는 연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앞 연들에 의해 입체화된다. 순서대로 살펴보자면 첫 번 째 반복은 환희에 찼던 과거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 그리고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 두 번 째 반복은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영원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느끼는 불안함, 세 번 째 반복은 절망적인 감정, 네 번 째 반복은 실연에 대한 확인 후에도 남아 있는 미련을 환기한다. 평면적인 풍경이 '일어나' 읽는 이와 교감하게 만드는 것은, 나아가 읽는 이를 센 강 위의 미라보 다리로 이끄는 것은 이 반복되는 구절이 앞 연과 작용하여 만들어 내는 마술적인 힘, 즉 언어의 연금술이다.
[메를랭과 노파], [언덕]에서도 시공간이 혼재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메를랭과 노파]에서 수음을 통해 연인과의 사랑의 순간으로 이동하는 것, 완전무결한 기억인지 환상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환각의 순간에 들리는 연인의 목소리, 백년 전부터 불러주기를 소망했다는 말은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가 뒤섞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얻은 지혜와 자신의 시에 대한 예찬으로 옮아간다. '사랑의 실패에서 얻은 기억의 아들'은 바로 자신의 작품을 의미한다. 아폴리네르는 이 시에서 자신의 작품을 '정말로 내 아들', '이마가 불의 후광으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형상화시킨다. 전설에 따르면 메를랭은 자신이 사랑한 비비안에게 산 채로 매장당하는 운명이다. 그러나 그의 인식은 고통의 봄은 때가 되면 항상 자신을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어지럼증으로 표현된 자신의 콤플렉스가 사실은 자신의 시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