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이야기 역사인물도서관 5
강영준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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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를 처음 접한 건 교과서에 실렸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말이야? 뭐 이런 제목이 다 있어?’ 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겠고 좀 기이한 느낌이었달까? [바로 날도 저물어서,/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 구절을 읽고 난 뒤엔 확신했다. 아, 문제 내기 좋으라고 실린 시구나. 그런데 자의든 타의든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 보니 입 끝에 뭔가 서글픈 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저 시를 적을 때 애달프고 고단하지 않았겠나 하는 마음이 들어 어쩐지 짠하기도 하고. 백석은 내게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시간이 지나 백석의 삶을 책으로 재조명한 책을 만나게 되었다. 기존에 백석 평전이 나와 있긴 했으나, 예전에 멋모르고 어떤 인물의 평전을 읽다가 어려워 쩔쩔맨 경험이 있어서 평전에는 쉬이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 백석 시와 동명인 책 ≪흰 바람벽이 있어≫는 상대적으로 읽기 쉽고 접근성이 좋게 만든 책이어서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백석이 월북한 시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찾아보니 월북이 아니었다. 원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였는데, 경성에 머물다가 해방 이후 곧바로 정주로 올라갔으니 월북이라기보다는 재북에 가까운 셈이다. 그는 고향을 사랑하고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짙어서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어로 글 쓰는 것을 극히 피했다고 한다. 그의 시가 평안도 말과 토속적인 언어로 쓰여진 건 이 때문이라고.
백석은 본래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 교정부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때 백석은 그의 인생을 뒤흔들 두 사람을 만난다. 신현중과 박경련. 신현중은 백석과 같은 신문사에서 일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벗이 되었고, 박경련은 신현중의 여동생의 지인이었다. 백석은 박경련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란’이라는 애칭을 붙이며 애절하게 연모한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고, 중간에서 질투심으로 이간질을 한 신현중으로 인해 박경련은 백석이 아닌 신현중의 아내가 되고 만다.
백석은 크게 낙담했지만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어교사로 전직하고 난 후에도 그의 시작은 계속되었다.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시를 쓰고 자신이 살아왔던 평북 지역 말을 고스란히 시어로 사용했으며 어릴때 먹던 음식 이름도 하나하나 살려 아름다운 시어로 녹여냈다. 일제 강점기 감시를 피해 만주로 넘어가서까지 시를 쓰려는 의지가 강했으나, 해방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경성에 남지 못하고 그저 소박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다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후 6.25 전쟁이 일어나며 영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되었다.
시처럼 살고 시처럼 사랑한 모던보이 백석의 삶을 읽어볼 수 있어 좋았다. 다만 그가 북한 체제 하에 마음껏 시 쓰지 못하고 말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하니 그 재주가 너무 아까웠고 더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백석.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를 이제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 한참을 걷는데 뭔가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다. 바위틈 곳곳에 박힌 하얀 굴 껍질이 햇살에 반사된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다 물기를 머금은 껍질 조각이 누군가 애써 만든 자개 문양처럼 아름답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석이 손으로 굴 껍질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것은 바위에 꽉 엉겨 붙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바위틈에는 미역 가닥도 군데군데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그 것들 역시 바위와 사랑하듯 절대 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못다 한 사랑을 위해 평생을 홀로 지낸다는 통영의 처니처럼. _54p

🔖 낯선 만주, 가족도, 친구도, 직장도, 동료도, 사랑하는 연인마저 내팽개치듯 떨치고 떠나온 곳. 오로지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시를 쓰기 위해 선택한 곳.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시만 쓰면 된다고 여겼던 곳. 그런데 정작 정붙일 곳을 찾지 못하자 무거운 고독이 백석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석은 괴롭고 쓸쓸했다. 누구 하나 자신을 동정하거나 위로해 주는 이가 없는 게 고독을 더 뼈저리게 만들었다. 어째서 이지경에 이르렀나. _179p

🔖 "자기 경계를 무너뜨려야 다른 것과 섞이고 비로소 자유롭게 타오를 수가 있어요. 그 안에서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요. 시를 쓸 때도 모든 경험이 다 소중해요. 중요한 것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다른 것과 함께 뒤섞여 타오를 수 있느냐지요. 시는 불꽃 같은 거예요.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다 불이 붙어서 하나가 되는." _2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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