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 아저씨
김은주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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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만 반짝하는 선수가 되지 않겠습니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빠른 육상선수 다연. 100m 12초 03이란 기록을 세웠을 때 당당하게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더랬다. 그러나 열일곱이 되던 해 세계 신기록 갱신을 코앞에 두고 그만 발목 부상을 입게 된다. 비교적 깨끗하게(?) 부러진 발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붙었지만, 어쩐 일인지 달리려고만 하면 고꾸라지거나 나뒹굴고 만다. 분명히 부상이 다 나았음에도 달리지 못하는 다연을 두고 담임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코치는 반쯤 포기한 눈치다. 엄마는 아마도 심리적인 문제일 거라며 다연을 달래고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잡아준다. 그러나 여전히 크게 나아진 건 없다.

"아주 쉬워, 아홉 살 때부터 하던 거니까." 스스로를 다잡아보지만 왼쪽 발목이 부러진 것처럼 타오르는 통증에 발을 딛기조차 어렵다. 매일 좌절감을 맛보는 다연은 한강에서 우연히 어떤 아저씨와 만나게 되고, 아저씨에게 이런 저런 속내를 털어놓으며 위안을 얻는다. 이상할 건 없다. 그 아저씨가 '구구 아저씨', 즉 비둘기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비둘기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연은 거의 매일 구구 아저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상처로만 느껴졌던 부모님의 이혼에 대한 이야기도, 운동을 반쯤 포기하고 학업에 전념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구구 아저씨에게 털어놓고 나면 한층 후련해지는 것 같다. 그러면서 점차 '어떤 문제는 일단 입 밖에 내고 나면 별 게 아닌 법'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소중한 기록이 담겨 있던 휴대폰을 분실하게 되고 분실된 휴대폰들이 홍콩으로 팔려간다는 정보를 입수, 구구 아저씨, 프린스 아저씨(마찬가지로 비둘기...)와 함께 홍콩으로 향하게 된다. 비둘기는 비행기에 태울 수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좌절하지만, 곧장 항구로 노선을 틀어 어느 배에 잠입해 홍콩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촉망받는 육상선수에서 비둘기와 함께 홍콩으로 밀항하는 여고생이라니, 다연의 상황이 황당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이가 흔들리면 엄마가 실로 이를 묶은 다음 이마를 세게 쳐서 이를 뽑아주시곤 했는데, 이마가 너무 아파서 이 아픈 건 일도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다연 역시 지금 처한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혀서(?) 발목 통증도 심리적인 압박도 잊고 다시 달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다연이 누구의 도움도 거절한 채 혼자 좌절했다면 홍콩행은 물론이고 다시는 달리지 못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살다 보면 때론 남의 도움을 받아도 될 만큼 충분히 힘든 상태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구구 아저씨》는 도움을 받는 게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려준다. 난 구구 아저씨를 만나길 기대하기엔 너무 늙었으니, 내가 누군가의 구구 아저씨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해본다. 그애에게 꼭 이야기해줘야지. "새 출발 하지 마. 넌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냥 킵 고잉해, 킵 고잉, 너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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