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새벽을 걷는다 - 느리게 산책하는 사람의 사색 노트
이영란 지음 / 바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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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 때는 언제인가요?


여상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다 세상이 언뜻 다가와 제 무게를 당신에게 열어보이는 놀라운 찰나 말입니다. 예컨데 빨래를 널다 보풀 인 겨울내복을 집어드는 순간 갑자기, 웬수같던 막내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를 입 밖으로 내던 날이 떠올라 한없이 관대한 마음이 펼쳐지는 그런 때요. 이러한 우주적 만남의 순간은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또한 물러가지만, 종종 마중물을 부어 지하수를 길어올리 듯 각자 개성에 맞춘 특정한 의식을 통해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혹자는 '물멍'이니 '불멍'이니 하는 느긋한 휴식의 때에, 혹자는 일기를 적는 시간에, 그리고 저자는 새벽의 산책시간에 세상과 마주하는 거지요.


새벽을 걷는 한 사람의 사색노트, [오늘도 새벽을 걷는다]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

작가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사람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불완전함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부분이며 당연한 것이라, 서로 기대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따뜻한 온정이 필요한 곳, 돌봄이 필요한 곳이 사람이 있을 곳이라고요. 그래서일까. 한강 둔치의 취객이 남기고 간 쓰레기에서 어여쁜 흔적을 잘도 찾아내었습니다. "감정의 찌꺼기들은 한강 둔치에 홀로 남아있다(p.32)"는 표현이 다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사물이 아닌 사람의 사정을 봅니다. 소풍조차 과업처럼 허둥지둥 수행하고 서둘러 자리를 뜨느라 미처 단도리 못하여 흘리고 간 감정 조각들을, 타박치 않고 안쓰러이 여기는 시선을 품었습니다.



마음이 공허한 사람은 

사람에게 기대고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스스로에게 기댄다

(p.53)



제자리에 앉는 것도 

달리기가 필요하다

(p.55)



저자를 따라 문장마다 흩어져 있는 개성과 기억의 파편을 들어 맞춰봅니다. 어설프게나마 작가가 너저분한 자리조차 다정한 시선으로 훑을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쓰라린 시간을 보낸 게 아닐까 유추하면서요. 사람에게 기대다가 스스로에 기대며 단단해지기까지 '달리기'하는 맘으로 새벽을 걷고 관찰하고 적는 날들이 켜켜이 쌓여 다져지고, 숙성되어 '다감'이라는 보드라운 맛이 되었으리라 그렇게요. 새벽을 걸으며 저자는 단단해지는 법도 터득했을 뿐 아니라 비우는 요령도 얻은 듯 합니다. 물길에는 상한 마음 흘려보내고 경사를 오를 때는 숨 차서 생각을 덜어낼 수 있기에 물가도 걷고, 산도 올랐나 봅니다.




오늘의 고단함이

내 마음에 고이지 않기를

(p.134)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망각의 산을 오른다

(p.209)




속이 시끄러울 때, 우울한 기분이 들 때 저자가 전해 준 방법을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물길에는 시끄러운 감정과 고단함 흘려보내고, 뒷산이 멀다면 하다 못해 동네 언덕길을 오르며 헐떡여봅시다. 잊고 싶은 것은 잊어봅시다. 한마디 얹자면, '걷는다'는 행위는 실제로도 신경계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어 신체 건강 외에도 마음 건강, 뇌 건강에 매우 이롭다고 합니다.




사람이라는 책을 읽는다


저자는 새벽을 걸으며 다정한 글을 차곡차곡 쌓아왔겠지요. 저자가 눈에 담아 온 것은 애초에 산책길 새벽 풍경이었는데, 새벽 길 기록이 모여 '사람'에 대한 노래 한 권이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뒷부분에 수록된 시 "사람이라는 책을 읽는다(p.223)"가 가장 마지막에 위치했어도 괜찮은 결말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책은 사진집 같기고, 일기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하고, 산책 중 끄적인 메모 또는 시 같기도 합니다. 솔직하고 소탈합니다. 화려하거나 현학적인 수식어를 두르지 않아 책장이 훌훌 넘어갑니다. 세상을 건네보는 시선에 뾰족함이라고는 없습니다. 표지는 이 책을 '느리게 산책하는 사람의 사색노트'라고 소개하였습니다만, 저는 사람이 읽히는 책이라 안내하고 싶어요.



서재 한 켠을 시선집으로만 채워놓은, 한 때의 시인 지망생으로서 시집에 대한 욕심만큼은 지대하기에 시집 한 권 추가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오늘도 새벽을 걷는다'에서 시보다는 사람, 수줍어 하면서도 뜨거운 마음 지닌 한 사람이 언뜻 읽혔기에, 소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될 듯 합니다.


한 사람이 써내려간 사람이라는 책에서 "사람을 읽었습니다"


세상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은 영혼을 영글게 합니다.

흘려보내지 마시고, 24시간 중 어느 때 만큼은 그런 순간으로 채우는 호사 누리시기를, 부디.



*이 글은 바른북스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제가 직접 읽고 작성한 지극히 주관적인 포스팅입니다.


길에 사람을 심는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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