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2020년 하반기에 읽은 책 중에 제일 재밌었다. 나 스스로를 '소설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해왔는데, 내 기준 베스트 책들이 전부 소설인 걸 보면 그냥 소설을 좋아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형식으로 따지면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과 유사한 소설이다. <피프티 피플>에서는 서로 어떻게든 얽혀있는 50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면,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에서는 서로 어떻게든 얽여있는 12명의 여자들이 등장한다. 소설의 형식은 유사하지만, 분위기는 아주 다르다. <피프티 피플>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 따뜻함… 그런게 느껴졌다면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격정적이고 대담하고 거칠고 섹시하다.
이 소설의 특별한 점은 등장인물들에서 나온다. 12명의 여자들이 전부 흑인이자 영국인으로, 그들은 동성애자거나, 동성애 혐오자거나, 페미니스트거나, 페미니즘에 대해 별 생각이 없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어쨌든 모든 인물들의 삶에서 '영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흑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 인물들이 겪는 일의 시작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인종적, 성적 정체성에 닿는다. 이 소설은 12명의 여자들이 이 인종적, 성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열등감, 가난 또는 고통을 어떤 식으로 극복했는지 보여준다.
12명의 인물들 중 단 한 사람도 묻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이 재미있다. 어린 시절 같은 환경에서 비슷한 고민을 한 여성들이 아주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영국 이민 2세대인 어떤 인물은 죽도록 공부해 은행장이 되어 과거의 사회적 열악함을 극복하는가 하면, 그 인물의 어린 시절 친구는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슈퍼마켓 계산원이 된다. 12명의 인생을 담고 있으니, 이 책이 두꺼운 것도 당연한 일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이런 형식의 소설들이 그렇듯 알게 되는 인물들이 많아질수록 인물들 간의 관계가 드러나므로 더 재미있어진다. 앞에서 읽었던 인물이 아주 싫어했던 여자가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그 여자의 삶에 또 몰입하게 되는 식이다. 부커상 심사평 중 일부를 인용하며 마친다. '격정적이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우며 에너지가 유머가 넘친다. 단 한 순간의 지루함도 없이, 점점 고조되는 속도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문장 부호 사용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 또한 재미있다. 거의 모든 문장에서 마침표가 없다. 마침표가 찍힌 문장은, 한 챕터의 마지막 문장뿐이다. 마지막 문장이 인물의 어떤 상황을,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즐겁다.
인물들의 스토리가 전부 실존인물처럼 실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그 전개의 핵심에 페미니즘이 있다. (서양에서, 특히 영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알고 있으면 훨씬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물론 나도… 책 두세권 읽은게 전부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이 소설의 배경지식을 잘 알 수 있는) 영국인+여성이었으면 정말 더 흥미롭게 읽었을 것 같다. 오늘도 이 세상엔 더 공부해야 될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