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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평점 :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문이과 통합형 인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과학 시간의 보고서 결론을 인문학과 엮으면 점수를 더 잘 주기 시작하더니, 고3때도 문과에게는 과학을, 이과에게는 사회탐구를 가르쳤다. 교복을 벗은 지금 내 후배들은 문과와 이과 구분이 없어졌다고 한다. 친구와 하루가 멀다 하고 너는 이과니까 가서 로봇관절에 기름칠이나 해라, 너는 문과니까 가서 붓으로 훈민정음이나 써라 하며 다투던 나는 문이과를 구분하지 않는다는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능에서 탐구는 어떻게 선택해? 이과 과목 다 안배우고 공대 가면 어차피 대학에서 적응 못할텐데 이거 제대로 된 교육정책 맞냐?? 하면서 술자리에서 교육부 장관이 된 마냥 우리나라 공교육의 미래에 대해 떠들곤 했다. 어쨌든, 나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 없이 문과형 인간이었고 고등학교 내내 과학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며 (국어 내신은 1등급, 과학 내신은 7등급이었다) 그대로 커서 경영학과에 왔다.
그래, 이제는 과학에서 완전히 탈출했겠지..! 라고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대학에 와보니 오히려 국어와 영어, 사회탐구만 붙잡을 수 있었던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오히려 수학과 과학을 할 일이 더 많아진 것이다. 필수 교양 강의로 '생명과 환경'을 듣고, 코딩 프로그램을 만지면서 아아아니 내가 이거 하기 싫어서 문과에 왔는데 대학까지 와서 이게 무슨 일이냐, 동기들과 모일 때마다 불평을 주고받았다. 나는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문이과 통합형 인재'의 흐름은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보니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는 거다. (전공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수학과 통계를 만지면서, 교양 강의 때문에 생명과학 책을 읽으면서 어, 생각보다 이거... 재미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100년은, 문이과 구분을 떠나서 수학과 과학, 인문학과 철학이 모두 없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교재에 코를 박고 벡터 문제를 풀고 실험을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흥미를 느꼈다. 아마 마케팅을 하려면 빅데이터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 빅데이터를 더 잘 알려면 수학과 컴퓨터, 로직과 친해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서 시작한 것 같다. 이성적이고 엄정한 수학에서 출발해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까지, 대척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두 분야가 실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과 같은 걸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 거미줄 위에 올라타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민음사를 통해 좋은 기회로 이 책을 누구보다 일찍 읽게 되어서 아주 기쁘다!
천문과 기하는 수의 체계인 수학을 필요로 한다. 또 글자를 비롯한 조형을 다루는 모든 미술 분야는 물리 세계 속에 구체화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인간의 움직임과 결합해야 한다. 수학, 물리, 생물은 글자의 역사가 시작되는 조건을 형성한다. 그러니까 내가 타이포그래피의 글자체 변천사에 대해 가진 고유한 관점은, 빅뱅까지 가지는 않는 아주 작은 스케일이지만 일종의 빅히스토리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수학과 과학의 엄정한 방법론이 질서를 찾아가고 검증을 거치는 과정은 경이롭고 아름답다. 내게는 과학과 기술이 효율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언제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 책은 이야기, 유머, 꿈, 이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뭐야. 너무 인문학적인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인공지능, 상전이, 평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유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방은 탄소가 사슬처럼 길게 늘어선 분자구조를 갖는데, 늘어선 탄소 가지 주위에 수소가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상전이라는 주제에서 라이트/볼드한 폰트를 논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주제에 대해서 어떤 얘기를 할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다. 그냥 정신을 차려보면 유려한 작가들의 글을 따라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넘어가 있는 것이다. 5페이지 내외의 짧은 글 안에서 너무나 멀게 느껴지던 주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글들이 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가볍게 만든다.
우리는 별에서 온 원자들이 우리 몸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는 과학의 진실을 안다. 인간은 필멸이라도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는 불멸임을 안다. 이 사실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필멸의 생명이란, 원자들을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조립한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 아님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주 속 유구한 생명의 흐름은 지속될 것을 알고도 개체의 소멸을 애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퍼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타이포그래피라는 분야 자체가 나에게 흥미롭지만 생소하고, 멀리 떨어진 디자이너들만의 세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책의 첫 장, '글자의 생김새로 보는 이야기들'이 왜 첫장인지는 확실히 알겠다. '어떤 폰트가 더 맛있게 생겼는지'를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이 저자에게 확 이끌리는 것을 느꼈다. 과학적 사실들과 수학 수식으로 미술과 타이포그래피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아 정말, 내가 몰랐던 예술가들의 세계는 이런식으로 발전하고 있구나. 지금 가장 21세기적인 예술가는 이렇게 예술과 소신과 과학을 합칠 줄 아는구나, 생각했다.
엄밀히 말해서 검정은 색이 아니다. 색은 빛이 가지는 진동수가 결정한다. 빛은 전자기파, 즉 전자기장의 파동이다. 전자기파가 1초에 450조 번 진동하면 붉은색이 된다. 색을 가지려면 적어도 빛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검정은 빛 자체, 즉 진동할 것조차 없는 것이다. 결국 검정은 색이 아니라 색을 정의할 빛이 없는 상태, 즉 빛의 부재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상욱 교수님을 처음 알게 된 프로그램은 <알쓸신잡>이었다. 국내 곳곳, 심지어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며 펼쳐지는 인문학자와 소설가와 과학자와 건축가의 이야기에 나는 푹 빠져서 무한도전 이후로 해보지도 않은 예능 본방사수를 했다. (그 이후로 건축과 과학 책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으니, 이 책은 알쓸신잡을 좋아했던 사람은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고 확신한다.) 다정하고 차분한 말씨로 물리학을 풀어나가는 김상욱 교수님은 이 책에서도 여전한다. 초현실주의와 양자역학이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검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엄연히 말하면 검정은 색이 아니라 색을 정의할 빛이 없는 상태'라고 물리학자다운 정의를 내리면서도 '검정은 끊임없이 흑체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듯, 검정도 검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한다. 대체 이 세상에 과학자 말고 어떤 사람이 이런 결론을 내릴까!
이렇게 두 사람이 한 주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라면 이 주제로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두 사람은 너무 다르지만서도, 동시에 정말 닮아 있어서 모두 과학과 예술을 사랑하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와 양자역학이 동시대에 시작된 것이 우연이 아니듯, 예술가와 과학자가 <뉴턴의 아틀리에>라는 책을 2020년 4월에 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만, 예술만 알던 시대에서 벗어나고 있고 벗어나야 한다.
물리학으로 그림을, 인문학으로 수학을 다시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얻길 바라며.
그리고 이 책이 그 시작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