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옮김 / 후마니타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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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서평.

 

적대하는 평등한 세력들간의 모순적 접합이라는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신사회운동의 결합, 혹은 포스트모던의 조건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공간을 사유하려하는, 무페와 라클라우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20세기의 사회주의적 실험들을 지탱하는 교리가 되었던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적인 것으로서(이미 그 시효를 다한 것으로) 규정하고 21세기의 마르크스주의 정치론을 시민성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발리바르의 작업들, 혹은 헤겔식 목적론의 색체가 짙은, 종말론적인 필연성의 유물론의 자장 속에 있었던 소련 공산당의 모델들과 규범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유럽 신좌파들의 출현, 나아가 오늘날 각광 받고 있는 바디우, 랑시에르등의 사변철학적 경향 등을 관류하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 그 자신의 이론적 전사(前史) 혹은 이론적 변곡점을 알튀세르로 두고 있다는 점에 있다. 알튀세르가 없었다면, 오늘날 좌파적 혹은 학술적 담론지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모든 흐름들이 적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60년대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이론적/실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갱신이 요청된 시기의 지표적인 텍스트가 되어주었다. 한국의 경우엔 이른바 PDR(People’s Democracy Revolution),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의 이론적 시원(始原)중 하나였던 발리바르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철학, 사회학, 문화연구, 사회운동 등에 광범하게 수용되며 그 장들의 지형에 큰 파란을 불러왔다. 그런 알튀세르의 사상을 압축적이고 개괄적으로 담고 있는 저작<마르크스를 위하여>가 믿음직한 학자에 의해 재번역 되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환영할 일일 것이다. 한편 옮긴이의 해제에서도 지적되고 있듯, 그의 이론체계는 60년대 후반 이후로 그 자신의 수정과 보충, 번복, 비판을 거쳐 갔기에, 다른 학자들에 비해 그 특징을 정확히 개괄하기란 어렵다.

 

우선 우리는 적어도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한하자면, 마르크스주의에 가해진 대내외적 공격(내부로는 교조주의와 이른바 '세계관 마르크스주의' 혹은 "인간주의"에 의한, 외부로는 경제환원주의라는 비판에 의한 공격)으로부터 마르크스를 유예시키고, 마르크스 고유의 이론적 지반과 특징을 따짐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회생시키는 것이 알튀세르의 근본적인 의도였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논문중 60년대 초중반의 작업들을 모은 이 책은 지극히 정세적인 텍스트이며, 각 논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엄연히 일정한 시차 속에서 쓰인 (일관된)개별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의도는 적어도 본인의 작업 그 이상으로 나아갔음을, 오늘날 좌파적 담론에 익숙한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유럽 등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넓은 의미에서 범좌파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널리 수용되며 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신좌파의 시퀀스를 열어젖혔을 뿐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에 대한 도식적인 해석 등에 의해 정체 상태에 빠져있던 이론적 전선을 가다듬으며, 수많은 지식인들의 창구와 우회로로서, 일종의 숨구멍으로서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허나 필자의 여건과 능력상, 이 저서와 숱한 동시대의 사상들이 공유하는 사상적 함의와 영향사적 계보를 일일이 따지는 것은 역부족이므로, 이하의 서평은 이 책 자체에 대한 내용과 개념들을 중심으로 진행 될 것이다.

 

본문의 1장에 해당하는 <포이어바흐의 철학적 선언들”>에서부터 제시되는 문제설정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와 이론이 공유하는 일종의 인식되지 않는 전제로서, 그의 초기 이데올로기론을 지탱하고 마르크스를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론가로서 위치시키려는 시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한 이데올로기는(...)이 문제들의 해법을 고정하는, 작동 중이지만 자백되지 않은 문제설정에 대해 비의식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문제설정은 일반적으로 열린 책처럼 읽히는 것이 아니며, 이 문제설정이 그 속에 묻혀 있지만 그 속에서 작동하는 이 이데올로기의 심층으로부터, 빈번히 이 이데올로기 자체를 거역해, 끌어올려져야 한다."(131p)

 

<청년 마르크스에 대하여>에서도 부분적으로 드러나듯, 알튀세르에게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의미하는 것은 대상의 요소를 부정하거나 기각하는 것, 각론들에 대한 반테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론을 매개하는 총론 그 자체의 구심점으로서의 '문제설정'을 드러냄으로써 이데올로기 자체를 그 뿌리, 전제들에서부터 상대화시켜내는 것을 말한다(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추후에 보다 정교하게, 요컨대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이론(과학) 역시 이데올로기의 자장 속에서 그 자신의 대상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는 데에 까지 나아간다).

 

한 이데올로기의 종국적인 이데올로기적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고찰되는 대상들의 직접적 내용이 아니라 문제들을 제기하는 방식이거니와, 이 문제설정은 역사가의 고찰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일반적으로 철학자가 문제설정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문제설정 속에서 생각하기 때문이고, 철학자의 "이유들의 순서"가 그의 철학의 "이유들의 순서"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130p)

 

한 과학의 이론적 실천은 자신의 전사에서의 이데올로기적인 이론적 실천과 항상 명백히 구별된다. 이 구별은 우리가 바슐라르와 함께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용어로 지칭할 수 있는 질적불연속의 형태를 취한다.”(289p)

 

앞서 서술하였듯, 그는 추후에 본인의 초기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과학 자체가 유효한 것으로 거듭나기 위해 그 또한 이데올로기적 장에 의존해야함을 지적하였으나, 본 저서에서의 알튀세르는 특징적으로 청년마르크스와 성숙기마르크스 사이의 절단을 주장하며 그의 고유한 개념들이 개진되기 시작하는 <독일 이데올로기> 이전의 청년 마르크스를 미완성, 이데올로기적 오해, 포이어바흐적(흔히 헤겔적이라 오해되는) 인간주의의 마르크스로서 규정한다.

 

잠시 곁가지를 치자면, 언어를 조직하는 조건으로서의 라캉의 "대타자", 이데올로기와 이론의 공통의 조건으로서의 알튀세르의 "문제설정" 개념 사이의 상관성을 따져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라캉 정신분석학의 "대타자"가 이데올로기 일반, 즉 환상의 구조 혹은 전제, 조건이라면,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은 이데올로기와 과학이 공유하는, 대답에 대한 전미래 혹은 선험이 되는 비의식적인 질문의 구조이자 조건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양자의 상동성은 요소론적 수준에서나마 관심을 끈다(물론 양자의 목적과 체계의 엄밀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알튀세르의 가장 큰 업적이자 특징으로서 논의되는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에 대한 배격은, 단지 "포이어바흐적 문제설정"(71,89p)에 사로잡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청년 마르크스와 성숙기 마르크스 간의 철저한 절단을 주장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불러도 좋다면) 확장 및 재전유를 통한-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합적인 사고를 유도할 수 있는, 도덕적 파토스가 제거된, 표백된 개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상을 그려내며 이 개념 자체를 이론적으로 중립화하려 하는 시도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이러한 시도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에서 완전히 정리된 상태로 제시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저자의 특유한 차별성이 무엇인지를, 즉 하나의 새로운 의미가 출현하는지 여부를 결정해 줄 수 있는 것은, 개인적 사고의 고유한 문제설정을 이데올로기적 장에 속하는 사고들의 고유한 문제설정들에 관련시키는 것이다."(132p)

 

알튀세르에게 청년 마르크스와 성숙기 마르크스 사이의 "절단"은 이성을 향한 이념 간의 상호"지양"이라는 헤겔 식의 (목적론적)관념론을 내포하는 개념이 아니라- "발견들"로서, 1840년 이후의 물질적 조건들 속에서 마르크스가 프랑스, 영국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 들 및 정치의 장을 발견함으로써 그 자신이 처해있던 "독일적 이데올로기"를 상대화시켜 내게끔 한 실제적 현실, 객관적 세계로부터 연원한다. 그는 정확히 "진리의 내재성이라는 환상 속에서 자신의 종말[목적]을 공허하게 예견하는 것일 뿐인 지양이라는 무고하지만 음험한 개념에 내포된 헤겔 논리의 정신을 버리고, 이데올로기적 내재성의 환상들을 정확히 종식시키는 실제적 경험 및 현실적 출현의 논리를 택해야"(152p)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청년 마르크스에 대하여>의 곳곳에서, 이데올로기와 철학은 '전미래', 즉 미래의 행위에 앞서 발생하는 어떤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는 '토대- 상부구조'의 마르크스의 개념에 내재한 유물론적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토대 만능주의- 조야하고 도식적인 경제환원론의 함정을 비켜간다.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테제를 담고있는 <모순과 과잉결정>에서 알튀세르의 관심은 보다 선명하게 제시된다. 그것은, 관념론적인 헤겔 변증법의 대상을 물질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행위로서의 "헤겔 변증법의 전도"라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일종의 은유로서 파악함으로써, 실제로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변증법 사이에는 단순한 대상의 전환으로 해명 할 수 없는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추출"이라는 단순한 기적에 의해 헤겔 변증법이 헤겔적이기를 그치고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이 된다고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165p)

 

이는 과학적이고 정합적인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정립으로 요약되는, 그의 평생의 관심과 직결된 문제로서,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지니는 특수성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어 그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대한 레닌의 주석들을 참조하며, 경제 혹은 "자본-노동의 모순"이라는 "최종심급(본래는 엥겔스의 <블로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지된 개념인)" 이외의 심급들, 이데올로기들의 복합적인 작용의 존재를 지적하고, "이 모순이 강한 의미에서 "능동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즉 단절들의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정황들""흐름들", 그 기원과 방향이 어떠하든 간에(...) 하나의 단절의 통일성 속으로 "융합"되도록 축적되어야 한다."(177p.)는 테제를 제출한다. 이어 제시되는 것은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들과 형태들에 의해 항상 특수화된다(...)."(188p)라는 유명한 정식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모순의 다수성에 대한 인식이자 최종심급의 결정이 갖는 위상으로서, 훗날 수많은 신사회운동들의 알리바이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공존을 사유하려는- 이른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일부 흐름들의 원천이 되는 대목이다.

 

물론 알튀세 본인은 현상/본질의 모델을 비판하며 마르크스를 그로부터 떼어내려 했으나, 편의를 위해 위 구도를 통해 말하자면, 그의 관심은 순수한 원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언제나 개별 현상들의 상호작용 및 합으로서 구성되기에, 현상으로서의 '상부구조- 이데올로기'항들의 독립적 공간을 마련하고, 그들의 상호작용의 효과에 경제라는 심급이 관통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모순과 과잉결정>의 발표 후에 일종의 보론으로서 작성된 <보유>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 변증법적 유물론의 외부에서 도입된, 어떤 대상에 적용되어도 무방할만큼 순수한 정신적 원리의 모델을 통해 "최종심급"을 설명하려는 엥겔스의 시도를 집요하게 비판한다. "(...)엥겔스는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해법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왜냐하면 엥겔스가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전제들로부터 출발해 제기한 문제 이외에 다른 문제는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223p) 이는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자, 과학을 자처하지만 그 자신의 실제적 대상을 지니지 않는 "이데올로기"들에 부치는 알튀세르의 비판으로서, <모순과 과잉결정>의 한복판에서 제기되기도 하는, 그의 일관된 입장이다.

 

"우리가 헤겔로부터 보는 것은 무엇인가?(...)그것은(...)한편의 물질적 삶과 다른 한편의 정신적 삶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관이다."(191p)

 

물론 헤겔에게도 변증법의 요소들, 어떤 의미에서의 모순의 다수성은 존재한다. 허나 알튀세르에게 헤겔의 모순론은 다양한 모순들의 주요 모순으로의 소급, 또는 매개, 모순의 각 항들 자체가 상위 모순의 모습을 형성하고 결정하기도 하는 역관계, 혹은 교차성에 대한 사유가 없이, 모순들의 증식에 대한 서술로 귀결된다. 알튀세르는 이를 (마르크스주의의)“실제적 과잉결정의 복잡성”(181p)과잉결정의 겉모양만을 갖는 누적적 내부화의 복잡성”(같은곳)으로서 구분하며, 헤겔의 모순을 후자에 위치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알튀세르의 사사를 받았으나 결국 그를 등지게 된 바디우와 랑시에르 등이 나아간, 그 자신의 대상을 갖지 않는 자족적이고도 순수한 정치의 모델에 대해 특권을 부여하는 사유 또한(알다시피 랑시에르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라는 준거를 갖는, 경제라는 대상을 지니는 정치 개념을 '메타 정치'라 비판하며 정치 자체의 자율적 공간을 정치의 일회성; 유일성; 사건성을 내세워 옹호하며(다음의 저서를 참조하라.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역, , 2015.), 바디우는 '사건'에 대한 이론화를 통해 암묵적으로 정치를 비일반적인 것, 예외적인 것으로서, 순수한 사유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가 비판한 순수한 관념들의 자율적 운동을 서술하는 "사변철학"으로서의 헤겔주의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는, 헤겔 변증법에 대한 단순한 전도가 마르크스 사상의 특이성을 설명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헤겔이 승인했던 물질/정신의 "단순한" 분리의 토대 위에서 후자(정신-이데올로기-상부구조-정치)를 강조함으로써, 즉 경제적 문제설정을 기각함으로써 마르크스를 극복한 독자적인 이론을 구축했다고 얘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경제로부터 후퇴함으로써 조우하게 된 것은 정신주의와 사변철학일 뿐더러, 외려 마르크스주의의 발견(정치의 대상으로서의 경제라는 유물론적 기획)으로부터 시간적으로 후퇴한, 헤겔적 전통으로의 퇴행을 암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동시에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알튀세르는 여기서 헤겔의 정신적 환원주의를 비판하며, 역사의 각 요소들, 모순의 항들이 서로에 대해 외부적인 상태를 헤겔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과잉 결정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런 규정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 본질에서 다른 규정들에 대해 외부적이지 않다.(...)무엇보다도 특히 이 총체는 이 모든 구체적 규정들의 진리인 유일한 내적 원리 속에 반영되기 때문이다.(...)이 원리는 오직 하나의 중심, 즉 원리 자신의 기억 속에 보존된 과거의 모든 세계들의 중심을 갖는다. 이 때문에 이 원리는 단순하다.”(182-183p) 즉 모순의 다수성, 상호결정을 위해 항들은 서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겹쳐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겹쳐지지 않는 대상들을 총체화된 시선 속에서, 일종의 전일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과연 헤겔의 정신주의, 이데올로기이기만 할까? 외려 서로에 대해 철저히 절단된, 그리하여 외부적인 독립된 항이야말로 결국 관념의 산물로서,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외관상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와 담론들은 그들이 온전히 자율적인 것으로 보이는 순간조차도 언어 자체가 전제하는 기표상의 동일성으로, 폭력적으로 소급되고 환원된다. 요컨대 니체식의 표상, 언어 비판과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이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상부구조들 및 다른 "정황들"의 특유한 효력에 대한 이론은 대부분 앞으로 정교제작해야 할 상태에 있다(...)."(201p)

 

"(...)어떻게 이 잔재[이데올로기]를 사고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들을 몇개의 현실들로부터, 마르크스에게 정확히 현실들인 것, 즉 상부구조들, 이데올로기들, "국민적 전통들", 나아가 풍속들과 한 국민의 "정신"등으로부터 사고해야 한다."(204-205p)

 

한편 여기서 우리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토대로서, 정치의 대상으로서 사유하며, 이른바 "[정치의]타율성의 타율성"이란 형상에 조응하는 "시빌리테civilité의 정치"로 전화되는 발리바르 식의 기획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초기의 이데올로기 모델과 과잉결정되는 모순 개념이 가미된, 어떤 의미에서 구조주의적인(선험으로서의 주체가 아닌 구성되는 주체로- , '개체(개인)'로부터 '체계(사회)'로 흐르는 담론적 벡터를 '체계'에서 '개체'로 역전시킨다는 의미에서의 구조주의) 예술비평론인 <피콜로 극단>에서 알튀세르는, 극의 네러티브와 주인공들의 감정 묘사를 향한 동일시를 통해 획득되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특권부여로 특징지어지는- 고전극에 맞선,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옹호하며 베르톨라치의 <우리들의 밀라노>로부터 작품의 "구조적 동역학"(249, 253, 257p)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낸다. 이는 "작품의 구조적 요소들 사이의 내적 세력 관계들 및 내적 세력 비관계들"(249p)로서, 한편으론 그가 "멜로드라마적 의식"이라 표현한 일종의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드러내는 극중의 아버지의 변증법, 즉 어떠한 균열도 없는 비역사적이고 균질한 동일성을 담보하는 아버지의 세계; 환상이 차지하는 구조적 공간과, 그로부터 절연하며 아버지의 시간성으로부터 절단된 니나의 시간성- 다시말해 그녀가 연모하던 광대의 죽음을 유발한 악인에 의해, 그리고 그 악인을 죽임으로써 환상과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세계를 지키려한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접속된 새로운 세계(비록 그것이 몸을 파는 일이라 해도)의 시간성이 차지하는 구조적 공간 사이의 단절로서 주어진다. 물질적 조건들의 변화에 따른 시점의 이동을 통해 변화하는 것은, 단지 의식이 아니라, 니나의 실제적 세계 자체인 것이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소여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과학으로 대체되는 순간이 정신의 변증법이 아니라 물적 토대, 현실적 조건들로부터 비롯됨을, <우리들의 밀라노>에 대한 독해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라캉 식의 정신분석의 윤리-“환상을 횡단하기/가로지르기”-와도 겹쳐지며,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허나 철저히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라캉과 공명하게 될 것임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논하는 대목에서 이는 보다 선명히 나타나는데, 그는 동일화를 통한 카타르시스로 지탱되는 고전극의 알리바이를 자기의식적인, 심리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애초에 “[관객]우리 자신이 미리 극 자체”(261p)이기에,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발견하는 것자체가 대상 그 자체임을 말한다. 이는 라캉이 즐겨 말한 타자의 응시의 다른 표현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바라보는 순간, 대상은 이미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다음의 저서를 참조하라. 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보기>, 김소연 역, 시각과 언어, 1995.).

 

의식의 독립성과 자율성이라는 이데올로기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드러내는, 이 지극히 유물론적인 개념과, 알튀세르의 놀라운 정리는 진정으로 유물론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단언을 담고 있다. 그것은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객체의 우위, 즉 존재에 대한 (변형가능한)선험으로 주어진 대상/객체야말로 주체라는 효과에 대한 조건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물론 어떤 독자들은 아도르노가 참조하는 마르크스는 알튀세르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던 소외론적마르크스임을 지적할런지도 모른다. 허나 적어도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른바 경제의 문제들과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설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측면에서 사실상 양자는 대립하지 않는다). 한편의 극으로부터 시작된 유물론적 주해는 결국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극 자체가 관객의 의식인 것으로 보인다.(...) , 관객의 의식은 이 자기 인지, 연극이 그것의 형상이고 현시인 이 자기인지로부터 연극이 생산하는 새로운 결과이다.(...)연극은 실로 생성이고 관객 속에서의 새로운 의식의 생산이다.”(262p) 이때 연극의 자리에 대상’, ‘객체를 넣어본다면 지금의 논의가 한결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예술이라는 범주를 이데올로기의 한 항으로 사고한다면, 이는 객체의 우위를 주장하는 동시에, 이른바 물질적 힘을 지니는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유명한 테제의 예술적 적용의 실마리를 드러내는 텍스트로 이해될 수도 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과학 개념의 구분을 무효화시키기 전에, 이미 순수한 과학의 불가능성, 그 달성의 한계들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1963년의 텍스트인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들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무언지 모를 어떤 은총에 의해 언제까지나 보호받는 순수한 이론적 실천, 완전히 벌거벗은 과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한과학은(...) 이 과학을 점거하고 있고 이 과학에 출몰하거나 이 과학을 감시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그 과학을 부단히 해방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294p)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그 수정을 거치기 전까진 비의식적인 관념론”, 즉 자신의 대상을 갖지 않는 혹은 정신으로 환원된 대상만을 갖는, 스스로의 물질적 조건을 사고하지 못하는 관념형태를 지칭하며, 따라서 그 물질적 조건을 해명하는 과학을 통해 단절가능한 대상이었으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선 이데올로기의 편재, 이론/실천의 조건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이라 할 법한 테제들이 제시되며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이분법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여기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한, 세계관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하게, 마르크스주의를 이데올로기 비판에 가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으로 승격시킨다. “(...)다양하게 변장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실천과 구별되는) 이론적 실천의 이론, 즉 유물론적 변증법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 변증법에 대한 특유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다.”(296p) 이는 순수한 과학의 불가능성에 관한 인식과 모순되는 것인데, 이는 초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내재하는 일종의 긴장을 담지시킨다.

 

결론적으로, 모순의 다수성과 복합성, 그들 사이의 다층적인 관계를 사유하지만 동시에 일종의 초월적인 모순의 담지자, 최종심급으로서 경제의 위상을 사유하려했던 그의 이론은,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들이 구현하는 다양한 모순들과 핵심 모순이 매개됨을 주장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허나 그런 그의 사유는 한편으로 기계적 유물론과 조야한 경제결정론, 종말론적 환상들로부터 마르크스를 구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다른 한편으론 다양한 신사회운동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배타적인 존중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로서 작동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작금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좌파가 처한 곤경을 암시하기도 할 것이다. 개별 단위와 부문들, 카테고리들, 이데올로기적 장들은 명확히 구별되고 자율적인 동시에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며, 언제나 어떤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접속 상태에 있다. 이는 현실을 추동하는 힘이 단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근본적인 모순이 작동하는 공간, 즉 경제적인 것의 존재자체를 경유하지 않는 한, 사회적 관계들은 더 이상 조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의 수용자들이 매개라는 (한편으로 지극히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개념 자체를 기각하고, 담론들, 실천들의 환영적인 평등을 주장한다면, 알튀세르는 그가 상정한 이론적 과업에 성공하는 동시에,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이에 대해 이 책의 역자는 알튀세르가 본인도 모르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체와 탈구축을 실행했다고 말한다). 결국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알튀세르는 추상적이고 그 자신의 대상을 갖지 않는 공허한 의식, 정신을 통한, 사회에 대한 규정 아닌 규정들이 난무하는 데에,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적 정치학의 지형을 닦는 데에 기여하지 않는가?

 

물론 이것은 그의 이론자체가 아닌, 그의 이론의 효과로서 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이론적 측면에서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인간주의를 비판한 것과 별개로, “최종심급의 고독한 종은 울리지 않기에, 사회의 각 부분들, 미시적인 카테고리들, 더 나아가 엄밀성을 갖지 못한 비-이론들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동일한 위상을 갖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요컨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서 정교해진, 그의 이데올로기론은 비의식적인, 질서와 논리, 개념들의 토대를 이루는 일종의 전제이자 한계 그 자체이기에, 무차별적이며, 모든 담론, 행위들의 질적이고 위상적인 차이/위계를 평준화시킴으로써 무효화시킨다. 말하자면 그의 이론적 지평 내에서는, 어떤 과학도 사실상 더 이상 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인식론적 다원주의의 공간이 마련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지에 관해, 요컨대 어떤 보편법칙에 의해 규정가능한 세계를 살고 있는지에 관해, 혹은 어떤 생산양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알튀세르가 명확히 답해주지는 않는다. 그는 당시의 좌파들에게 절실했던- 마르크스주의적 담론에 대한 하나의 메타인식, 혹은 태도를 제시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적 실천 속에서 필요한 것은, 어쩌면 알튀세르의 작업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이미 우리는 교조주의가 아니라(간혹 눈에 띠는 스탈린주의자들은 외려 반가울 정도로), 냉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적이 된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지젝이 굵직한 작업들에서 냉소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모순의 다수성과 그 상호작용, 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모순 자체에 대한 인식, 더 구체적으로는 총체적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를 1차적으로 규정하며 이를 매개할 수 있는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가 후기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 속에서 행위하고 사유한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이들이 대관절 몇이나 되겠는가? 알튀세르가 이 저서에서 집요하게 배격했던, 마르크스의 그것보다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관념적이지만, 대상들, 변증법의 항들 사이의 지양과 해소를 통한 관계 자체의 변화를 긍정하는 헤겔 변증법을 외려 재평가할 시기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프레드릭 제임슨과 지젝 같은 이들이 헤겔리언 마르크스주의라는 오명을 감수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헤겔을 참조하는 이유가 어쩌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오늘날 알튀세르를 읽는다는 것’, 그의 철학의 의미를 현재화 시키는 것은, ‘알튀세르를 잊는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201724. 정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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