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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의 세계사 - 서양이 은폐한 '세계상품' 인삼을 찾아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2월
평점 :
설탕, 홍차, 술, 커피 등 특정 재화를 매개로 역사를 관조하는 ‘00의 세계사’가 유행하는 요즘이다. 사실 이런 범세계(?)적인 재화들의 역사 속에서 한국이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인삼’이라면 왠지 기대해 볼 만한 소재이지 않은가. 국사 교과서를 공부한 이들이라면 동아시아 교역체계 속에서 인삼이 한국의 전통적인 수출품으로 수 차례 언급되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조금 더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양란 이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큰 이득을 취했던 조선의 중계무역 이야기 속에서 이 무역의 축을 이루는 중국의 생사, 일본의 은, 조선의 인삼에 대해서도 들어보았음 직하다.
저자인 설혜심 교수가 인삼을 소재로 고른 이유도 이러한 독자들의 기대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지역적 범위를 한정 짓지 않더라도 세계적인 인삼 교역망에서 핵심부는 동아시아였으며, 서구는 그들의 욕망과 달리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저자는 인삼을 “월러스틴의 유럽중심주의적인 접근법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선택했다.
본서는 한국의 독자들이 대체로 인지하고 있을 법한 동아시아 교역사 속에서의 인삼을 충실히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인삼 교역망을 복원해내고 인삼에 대한 서구의 문화적 담론까지 공들여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 특히, 필자가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인삼(화기삼)이 미국의 첫 해외 수출품이자, 이후로도 꽤나 큰 비중의 효자 수출품이었다는 점이다. 저자 역시 “이 사실은 역사가들조차 잘 모르고, 미국 역사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이야기”라며 인삼의 미중 교역 서술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본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양서이지만,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양이 은폐한 ‘세계상품’ 인삼을 찾아서”(부제)라든지 “서양은 왜 인삼의 역사를 숨겨왔을까”라는 등의 과도한 수사들이다. 이는 저자가 제시한 인삼에 대한 서구의 담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서는 인삼의 유효성분 추출이 어려웠던 탓에 근대 약학 시스템에 더디게 포함되었고, 미국의 화기삼은 인삼의 국제교역망에서 ‘2등품’의 지위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서구인들은 인삼의 효능이 사실 대단치 않다고 서술하거나, 인삼을 동아시아의 전제성·미신·사치과 같은 전근대성을 담지물로 묘사하는 등 이솝우화의 ‘신 포도’식 사고 혹은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를 드러내기도 한 듯하다. 하지만 본서에서 서술하듯, 서구는 해독제·정력제 등 인삼의 효능을 여전히 주목했으며 대중(對中)무역에서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야생삼의 채취 또는 재배삼의 개발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서양의 많은 나라에서 “인삼은 여전히 열등하고 비합리적인 동양성에 갇혀 있”으며 “동아시아가 구심점인 인삼의 세계-경제체제”를 “부정하고 싶은 서구중심주의”로 인해 “서구 역사학이 인삼의 존재를 은폐”했다고 서술한 것은 서구의 의도로 과도하게 환원한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특히 근대 동서양 교역 네트워크에서 실상에 비해서 인삼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당시 세계교역을 이끌어가던 영국에게 인삼이 주력상품이 되지 못했던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와 같은 아쉬움은 저자가 제시하는 통찰력에 비하면 작은 편린에 불과할 뿐이다. 특히 인삼을 통해 비서구 지역이 주체가 되는 또 하나의 세계체제를 독자들에게 소개한 것은 본서의 큰 성과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