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 불확실한 시대, 최고의 결정을 이끄는 확신의 프레임
피터 애트워터 지음, 송이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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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다

최근 반도체 공급망에 다시금 균열이 생기며 전 세계 증시가 요동쳤다. 각종 매체는 연일 데이터를 쏟아내며 원인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했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불안의 파동이었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해서,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서, 혹은 더 나은 삶의 선택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보이는 것’들에 매달리지만, 정작 우리의 모든 결정을 좌우하는 것은 숫자의 흐름이 아닌 우리 내면의 ‘보이지 않는’ 감정의 파동일지 모른다. 세계적인 행동경제학자 피터 애트워터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자신감(Confidence)’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이 어떻게 개인의 선택을 넘어 거대한 경제와 사회의 흐름을 만들어내는지를 명쾌한 프레임워크로 증명해 보인다.


‘확신’과 ‘통제’라는 두 개의 축으로 감정의 지형도를 그려내는 ‘자신감 사분면’이라는 탁월한 도구를 손에 쥐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장점이 분명히 두드러진다. 높은 확신과 통제감을 느끼는 ‘안전지대’, 둘 다 낮은 상태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긴장의 중심’, 확신은 있지만 통제권이 없는 ‘승객석’, 통제는 가능하지만 결과를 알 수 없는 ‘발사대’. 이 네 가지 영역은 우리가 일상과 비즈니스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심리적 상태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추상적이고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자신감’이라는 감정에 구체적인 좌표를 부여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자신과 타인, 그리고 우리가 속한 조직과 사회의 현재 위치를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저자는 이 구조를 통해 팬데믹과 같은 사회적 공황 상태에서 사람들이 왜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하고 책임 소재에만 집착하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특히 위기를 피하는 데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한 환경을 의도적으로 찾아 익숙해져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은 큰 울림을 주었다. 즉흥극을 기반으로 한 ‘상황극단’을 운영해 온 내 경험이 떠올랐다. 대본 없이 무대에 올라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처하는 상황극은 그저 내가 좋아서 했던 활동이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회복탄력성’을 길러주는 훈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묘한 위로를 받는 듯했다. 취미 생활을 하면서도 위기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 웃기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 역시 이 자신감의 사분면 위를 끊임없이 오가는 여정이다. 좋은 원고를 만났다는 ‘확신’은 있지만, 시장의 반응이라는 미지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편집자는 ‘발사대’에 선다. 저자와 디자이너, 마케터와 함께 수많은 의사결정을 거치며 점차 ‘안전지대’로 나아가지만,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해 언제든 ‘긴장의 중심’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편집자로서 마주할 수많은 불확실성의 순간에도,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느끼는 감정 상태를 읽고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든든한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결국 명료한 진단과 유연한 대응이 중요하다. 우리는 미래를 정확히 볼 수다. 따라서 완벽한 예측도 불가능하다. 평소에 잘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감정에 집중하고 읽어냄으로써 현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감이 넘칠 때는 스스로를 더 면밀히 살피고, 자신감이 떨어질 때는 자신에게 더 관대해지라는 마지막 조언은 비단 투자자나 리더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품에 지녀야 할 삶의 지혜다. 이 책과 함께라면, 짙은 안갯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나만의 서사를 그려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을 가지려면 확신과 통제감이 필요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서, 그 일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며 통제할 만큼 적절한 준비와 기술, 자원을 갖추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 P14

사실과 데이터로 미루어볼 때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 P22

자신감이 높으면 통제하지도 않았고 통제할 수도 없는 것을 마치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거나,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다고 확신하게 된다. 자신감이 낮을 때는 그 반대의 경험을 한다. - P44

하위 계층의 자신감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극심한 사회문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격차가 더 벌어지면 긴장의 중심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좌절이 분노와 원망으로 바뀔 것이다. - P48

자신감과 취약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을지 모르지만, 그 무게는 같지 않다. 취약성은 더 무겁게 느껴지고 자신감은 더 가볍게 느껴진다. - P81

그러나 우리는 공황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 {중략}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와 훈련을 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위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려 애쓴다. {중략} 우리는 공황을 실패와 연관 짓는다. 공황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고 훈련하는 건 패배를 인정하는 것만 같다. {중략} 결과적으로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책임 소재에 집착하게 된다. - P86

{…} 공황과 무력감, 극도의 불확실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한 변화로 동반되는 격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다음에 벌어질 일을 두려워하기보다 앞으로 다가올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된다. - P94

리더는 위기 상황에서 직원들과 결과에 대한 주인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중략} 최고경영진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확신을 품고 통제를 할 수 있다고 느낄 때 기업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다. {중략} 위기 상황에서 고객과 가장 가까운 직원에게 의도적으로 권한을 위임하면 지친 고객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 P147

긴장의 중심은 피할 수 없는 환경이므로 이를 피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불확실성과 무력감으로 이뤄진 환경을 의도적으로 찾아내어 익숙해지고, 필요한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등 위기에 대비하는 편이 좋다. {중략} 즉흥극은 학생들을 단기간에 위험이 낮은 긴장의 중심 환경으로 밀어 넣으면서 즉석에서 통제하고 확신을 확립하는 경험을 쌓도록 도와준다. - P161

승객석을 우리가 갇혀 있는 환경이 아니라 우리가 머물기로 선택한 환경으로 재구성하면 우리는 억지로라도 대안을 고려하고, 더 나아가 그 대안을 준비할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중략} 즉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능숙해지기까지 실패를 거듭하며 긴장의 중심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감수해야 한다. - P277

승객석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내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중략} 행동하기를 미루지 말라. {중략} 통제권은 오직 내부에서 생겨난다. 우리 스스로 주도권을 갖지 못한다면 지금 경험하는 취약성을 계속 느껴야 한다. - P279

긍정적인 상상이 없다면 비즈니스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 P336

나쁜 습관을 버리고 더 나은 습관으로 대체하며 의사결정 방식을 바꾸려면 본능에 반하는 방식으로도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의도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 P338

감정을 알아차리고, 패턴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고, 절차를 연습하면 확신과 통제감을 되찾을 수 있다. 완전하고 무결한 실행을 추구하며 위기를 피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보다는 반드시 실수를 저지르고 앞으로 위기가 닥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중략} {…} 항상 자신감을 가지려 하기보다는 회복탄력성을 갖추는 데 힘써야 한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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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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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사라진 남자,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타임스, 가디언, BBC가 극찬한 이 시대의 문제적 작품!


비상 계엄 사태 이후 광장으로 나온 여성들. 응원봉이 광장을 환히 밝히는 동안 남성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기보다 혼자만의 안전한 동굴에서 고독을 택하는 남성들. 30대에 들어서면 하나둘씩 멀어지는 친구와의 관계. 40대부터 급격히 증가하는 남성 자살률. 50대와 60대 남성의 고독사는 한 해 전체 고독사의 절반을 넘어섰다. 고독과 고립은 한끗 차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타인과 융화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동굴 속에 갇혀 영영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는 출간 이후 타임스, 가디언, BBC 라디오 등 다수의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영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이 책의 저자 ‘맥스 디킨스’는 자신이 겪은 일화를 가감없이 소개하며 남자들의 우정, 감정 표현, 성향 등 관계 맺기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를 논리적으로 분석한다. 남성들의 우정과 여성들의 우정이 어떻게 다른지, 남성의 감정 표현이 왜 항상 어설프고 서투른지, 여사친을 대할 때와 남사친을 대할 때의 태도 차이 등 저자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문화적 및 과학적으로 풀어낸다. 남성 독자들에게 자신의 대한 성찰과 탐구의 시간을, 여성 독자들에게는 주변 남자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왜 남자들끼리 있으면 이상하게 불편할까?

초식남의 일상을 셀프 폭로하는 ‘웃픈’ 블랙 코미디!


저자 맥스 디킨스는 결혼을 앞두고 신랑의 들러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친구 관계를 돌이켜 본다. 그런데 마주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 나에게 진정한 ‘베스트 남사친’이 있었던가? 한때는 친했지만 어느새 멀어졌거나 만나면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 받는 사이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남사친들과 있을 때는 마초적이고 공격적인 남성 캐릭터를 ‘연기’해야만 할 것 같은 책임감에 시달려 온 그는 “항상 지속적인 감시를 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한다.


그중 남성 기숙사에서의 일화는 초식남 저자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힘들고 괴로웠던 경험으로 소개된다. 말끝마다 욕설이나 ‘섹드립’을 붙이지 않으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얕보이기 십상이다.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저자는 기숙사에서 지내는 내내 남성성을 연기하고 과시하며 그들(남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저자의 입담이 더해지다 보니 ‘웃픈’ 블랙 코미디로만 보일 수 있겠지만 그의 경험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남성 무리에서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는 일종의 “남성적 광기”에 사로잡혀야만 하는 걸까?


한편 저자의 진정한 베스트 프렌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함께 동거했던 두 명의 여사친 ‘호프’와 ‘필’이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들과 동고동락을 하며 진짜 ‘나’로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성 간의 우정을, 그는 “애정과 양면성과 모호함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당연히 그곳에는 성적 긴장감도 민망한 순간도 존재하겠지만 남성들은 이러한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여사친들과 있을 때 더 편한 나, 정상인가요?


‘남자답지’ 않아도 우정을 유지할 수 있다

남성성의 짐을 내려놓을 때 관계의 문은 더욱 활짝 열린다


남자들은 유머 감각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음을 책은 설명한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오줌 멀리 갈기기’처럼, 농담이 단순한 재미나 조롱이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로 이루어지는” 농담은 지위의 도구, 즉 남성 간 서열을 보여주는 도구가 된다. 책은 이 또한 남성성이 짊어지우는 일종의 맨박스라고 설명한다. 남성들에게는 “‘무대 앞’ 자아와 ‘무대 뒤’ 자아가 모두 존재하며” 남사친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어김없이 무대에 서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공연이 그러하듯 오래 지속하기에는 너무도 힘들고 진 빠지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남자다움, 남성성의 가면을 벗을 때 더 자유로운 ‘남사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나아가 그러한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남성성의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공격적인 ‘섹드립’을 주고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닌, 진솔한 감정을 터놓고 대화하는 관계가 남성 간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책에서는 ‘요 녀석들 합창단’이라는 커뮤니티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경쟁의 요소가 없는 합창이라는 사교활동을 통해 서로 다른 나이대와 직업군의 남성들은 한데 모여 노래를 연습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듯 쿨한 표정을 짓기 위해 사용할 근육도 남아 있지 않’게 노래를 부르고, ‘우리 모두가 방금 함께 해낸 것을 축하하는’ 경험을 공유한다. 파괴적인 마초 캐릭터를 애써 연기하지 않더라도 가면을 벗고 자기 자신으로서 다른 남성들과 연대하고 협력하는 경험은 새로운 남성 연대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대목이다.


살갑게 지내도 괜찮은 우정을 위해

먼저 다가가보는 건 어떨까


우정은 노력을 요구한다. 특히 감정 표현에 서툰 남성들에게 우정을 유지하는 것은 일생일대의 숙제로 다가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그들은 우정의 ‘유지 보수’를 어려워하며 친구 관계를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기존의 방식대로 개개인의 남성성을 강화하여 억지로 남성우정을 갈고 닦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우정이 이루어지는 맥락을 다시 만들어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오늘날 남성에게 필요한 것은 남성성이 아닌 다양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친구를 가지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친구가 되는 것뿐”이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다가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존에 알고 지내던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우정의 색이 바래고 함께 했던 시간들이 서글픈 얼룩으로 뒤덮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정은 단지 다른 모습을 띨 뿐이다.” 우정을 더욱 단단하게 지키기 위해 남자들에게는 “다양한 감정을 아우르는 레퍼토리”가 필요하며, 저자는 이를 “연장 상자”에 비유한다. 인생의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연장이 필요하므로 남성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제한하지 말고 확장하여 더욱 충만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


아주 짧은 말이라도 좋으니 친구에게 그동안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진심어린 우정의 말을 건네보자. 쑥스럽고 민망한 건 당연하다. 친구도 당황할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넨다면 상대방도 분명 나에게 같은 연약함을 보여줄 것이다. 더 깊고 더 단단한 우정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속살을 꺼내 보여주는 과정을 지나야만 한다. 이 책은 그 연약한 탈피 과정에서 남자들의 마음이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남성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해 자신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중략) 여성은 파트너, 어머니, 자녀, 친구 등 타인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 P55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인상관리’를 한다. 우리에게는 ‘무대 앞’ 자아와 ‘무대 뒤’ 자아가 모두 존재한다. (중략) …남성은 여성에 비해 무대 뒤에 더 많은 것을 남긴다고 느꼈다. (중략) 남성이 세상에 유머를 뱉는 것은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한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러니함과 초연함을 두르는 것이다. - P66

우리의 남성성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 P72

남자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항상 지속적인 감시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중략) 여사친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보여주느냐’가 중요했다. - P80

남자들은 감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활활 태워 보여준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P156

나는 줄스와의 추억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의 우정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가 함께했던 편안한 시간이, 박물관에 박제되어 2년에 한번쯤 찾아와 멍 때리며 바라보는 대상이 되지 않기를. 회상의 햇빛 때문에 색이 바래지 않기를 바란다. - P240

우리에게는 애정과 양면성과 모호함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대한 어휘가 부재하다. 그래서 친밀한 우정을 탐사하기 위한 지도를 그릴 수 없다. - P318

우정에는 다양성이 필수다. (중략) 한명의 친구는 마치 10각형 모양의 방을 이루는 하나의 거울 벽과 같아서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 모든 친구가 필요하다. - P384

나이가 들면서 친구를 잃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우정은 다르다. 우정은 단지 다른 모습을 띨 뿐이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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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격자의 차트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6
연여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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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만 흔하지는 않은 SF 소설


기술의 발전이 초래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인공지능에 의해 관리되는 사회, 인구를 통제하기 위한 공리주의적 선택. SF 소설의 애독자라면 선뜻 익숙한 세계관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적격자의 차트』는 익숙함을 활용하되 기존 문법의 상투성에서는 벗어나려 노력한다.


사회 중심에 있는 인공지능 ‘모세’가 인간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은 가장 큰 차별점 중 하나이다.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 영향을 받은 종래의 SF 디스토피아 소설 속 인류는 강력한 사회 질서에 의해 통제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유로울 권리를 약탈 당한 것이다.

그러나  『부적격자의 차트』에서는 인공지능이 선택권을 부여한다. 도시 계획 초기 단계에서는 생애 한도를 제한하고 상상을 금지하는 등의 규율을 반드시 지켜야 했지만 안정성을 확보한 이후에는 얼마든지 기존의 시스템을 폐기해도 된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안정감을 추구한 나머지 인류는 변화하지 않는 것을 넘어 변화를 두려워하고 금기시 여기는 방향을 선택했다. 선을 조금만 넘어도 서로를 고발하고 중재자에게 일러바치는 일종의 수직적 계급 구조를 체화體化해 버린 것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는 이 상황은 마치 오늘날의 현실을 풍자한 우스꽝스러운 우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인류를 멸종의 기로에 놓이게 한 재앙의 근원인 ‘리누트 바이러스’가 반려동물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100년을 가까이 사는 인간과 달리 기껏해야 20년 밖에 살지 못하고 생을 달리하는 강아지를 대체하기 위해 발명된 ‘리누트’는 처음에는 그 목적대로 인간의 생애주기를 함께 하며 한평생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인간이 사망한 이후에도 오래도록 살아남아 변이 바이러스를 몰고 다니는 매개체가 되어 버렸다는 설정은 다른 소설과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설득력을 가진다. 그뿐만 아니라 그저 반려동물과 함께 오래 행복하고 싶을 뿐이었던 소소한 목적에서 출발한 발명품이 인류에게 가장 큰 불행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게 느껴진다.



​벽 너머에서 건네는 손짓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벽 너머를 꿈꾸는 자. 벽을 그저 바라보는 자. 벽의 존재조차 모르는 자.

인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삶의 행로를 걸어가며 여러 종류의 벽과 맞닥뜨린다. 누군가에게는 성별이라는 이름의 벽이 솟아오르는가 하면 어떤 이에게는 나이나 경제력, 혹은 계급이나 국적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앞을 막아서기도 한다.


​’레드’는 벽 너머를 꿈꾼다. (꿈과 동일한 것으로 묘사되는 ‘몽증’이 치료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소설의 세계관에 입각해 본다면 재미있는 지점이다.) 벽을 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부적격적’인 행동이 뒤따른다. 사회는 당연히 개인의 일탈을 비난하며 막아서겠지만 벽을 넘기로 마음먹은 이에게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인류는 셀 수 없이 많은 벽을 깨부수며 발전해 왔다. 그 모습은 평화로웠던 적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과격했다. 벽을 치고 무너뜨리고 망치로 사정없이 두들겼다. 만약 부적격한 행동임을 인지하고 손에 든 망치를 내려놓았다면 지금의 인류는 훨씬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창조를 위해서는 건설적 파괴가 필요하다는 경제학자 ‘슘페터’의 관점에서 소설을 본다면, 레드의 유전자에 새겨진 직업이 건축가라는 사실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세인’은 ‘챔버’가 세상을 떠난 6년 전부터 벽을 응시하고 있다. 아직 그 너머를 넘보고 있지는 않지만 벽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며 사유한다. 행동이 스포츠카라면 사유는 연료이다. 사유 없이 행동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세인은 언제든지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차마 액셀을 밟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세인은 마치 고뇌하는 예술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시대의 토양 위에 불쑥 솟아난 수많은 벽들을 보고 괴로움을 느끼지만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선善이 아님을 알아도 생계유지와 같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벽 너머로 보내는 시선을 이내 거둘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속에는 사유라는 이름의 연료가 항상 가득 차 있다. 옆에서 누군가 함께 액셀을 살짝 밟아주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앞으로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세인은 처음부터 벽 너머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레드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작중 벽의 존재에 대해 가장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나오미’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환경에 모범적으로 적응하고 규율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한다. 물론 ‘세인’처럼 마음속으로는 자유로운 상상을 할지도 모르지만,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일련의 사건으로 현실에 순응하는 나오미의 성향은 한층 더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얼핏 생각하면 나오미를 비롯해 벽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쉽다. 하지만 벽은 진로를 방해하지만 동시에 바깥의 위험을 막아주기도 한다. 벽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안정감을 누리며 편안하게 여생을 벽 안에서 보내는 사람도 있는 데다, 앞서 말했듯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로 앞에 벽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벽을 넘거나 깨부수는 데 성공한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마련이지만, 그들이 등장하기까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지켜 온 것은 나오미 같은 성실한 인물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좋은 책은 작가의 노력만이 아닌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 숨은 조연들의 땀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

바다를 꿈꾸는 이들에게


​연여름 작가는 어느 인물 군상도 함부로 예찬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도전하고 부딪치라는 안일한 훈계로 마무리하지 않으며 세 부류의 삶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바다를 꿈꾸는 일을 잊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우리가 사유하고 상상하는 일을 멈춰 버린다면 리누트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지구보다 더 황폐한 세상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벽을 넘지 않는 게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 너머에도 분명 삶이 있음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벽을 넘었을 때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말한다.

『부적격자의 차트』는 다시 말해, 벽 밖에 서 있는 자가 벽 안의 우리를 향해 인사하는 손짓이다. 그 인사를 받아 손을 흔들지는 이제 우리에게 달려 있다.


​

줄거리


치사율 100%의 ‘리누트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유행으로 인해 인류는 멸종 위기에 처한다. 꺼져 가는 희망의 불씨 속에서 인공지능 ‘모세’가 최후의 생존자들 앞에 등장한다. 인류의 안정적인 생존을 위해 ‘존엄 소거’라는 이름의 안락사를 통해 인구를 조절하는 데 동의한 이들은 ‘모세’를 중심으로 마침내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돔형 도시를 건립한다.


​인공지능 모세가 만든 사회는 파놉티콘과 같아서,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실무자’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는 고발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여 사회가 존속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인데, 모세는 실무자 간의 갈등을 심판하지 않고 그저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 ‘중재자’라고 불린다.


병동에서 소거 대상자를 관리하고 마지막 차트를 작성하는 업무를 하는 모범적인 실무자 ‘세인’은 어느 날 낙상 사고를 당해 입원한 ‘레드’를 만난다. 인공지능 기기 ‘워터드롭’을 몸에서 분리하는 일, 상상을 하거나 꿈을 꾸는 일, 바깥세상을 궁금해하는 일 등, 지금까지 지켜 온 모세의 원칙에 과감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그를 세인은 처음에는 멀리한다. 하지만 사실 세인도 오래전에 소거된 ‘챔버’라는 인물을 상상하며 마음속으로 대화를 하는 금지된 행동을 남모르게 해 왔을 만큼 상상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에, 점차 레드의 말에 빠져든다.


세인과 함께 병동에서 일하는 수습 실무자 이폴과 베테랑 실무자 나오미는, 레드를 만나고 나서 세인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음을 느낀다. 한편, 세인은 레드가 말하는 돔 밖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금치 못하며 이전과는 다른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래도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야 세인의 머리카락이 파도를 타고 멀리 흩어져, 우리가 어느 백색의 땅에 있든 그의 꿈을 마음껏 꿀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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