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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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멸감’. 이 책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사회학자가 우리나라만의 사회적 문제를 이렇게 다루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제목을 보자마자 우리 사회의 문제와 관련된 내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너무 흔한 주제여서 였을까, 책은 너무 당연하거나 다 알고 있는 내용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모멸감에 대한 대안보다는, 진단과 반성에 대한 내용이 중점이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만의 문제점을 다시 되짚으면서 사실, 이제 이런 문제들을 계속 진단하고, 진단하는 말을 듣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겠다.

 신문을 봐와서 일까, 매일 모멸하고 모멸받고 그로인해 분노하고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일들을 매일 신문을 통해 봐와서 일까, 그로 인한 피로감일 것이다.

 

 

 

  사실 문제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 사회적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실천을 않는다.

사실 내가 질린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하루에도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본질으로부터 발생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신문에서는 매일같이 그런 문제를 다루고, 또한 동어반복식으로 해결책들을 고민하고 쏟아내고 있다. 책에서도.

 

 그럼 뭐하는가. 뿌리깊은 의식이 변하질 않고 실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걸 실천하는 한국인들만 바보가 되는 형국이다. 서로 눈치게임만 하고 있고.. 사실 한국병은 다른데 있지 않고 실천하지 않음의 병에 있는 것같다.

 

    

 

 

 하루는 신문에서 이런 제목의 기사를 봤다.

 ' 月 563만원 이상 버는 고소득층 49% "난 빈곤층" '.

  한 설문에서 '고소득층 응답자의 96%가 자신이 고소득층보다 못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와 관한 내용이 또 이 '모멸감'책에 있다.

 

 

p 88.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굴욕감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소비시장이다.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처럼 쓰고 싶다. 돈 벌면서 받은 '천대'를, 돈 쓰면서 받는 '환대'로 덮어씌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만만치 않다. 최소한의 신체적인 안락을 위한 소비라면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비교가 이루어지는 소비사회에서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자꾸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소비 급수의 사다리가 점점 높아지고, 웬만큼 재산을 갖고 있거나 소비를 하지 않으면 위신을 인정받지 못한다. 최소한의 품위 유지비가 너무 높다.

 

그러니까 500넘게 벌고 빈곤하다고 하겠지..

 

 

 

 

 

 갑,을을 내세우고 인간 이하의 짓을 하는 회장님’,

 돈이 없는 사람은 부끄럽다고 명품으로 치장하는 부자,

 미소를 내세우는 감정노동자를 희롱하는 소비자,

 신분제가 붕괴한지가 언제인데 뿌리깊은 신분의식을 지닌 구한말 인간,

 해외에서 한국인이 피부땜에 차별당했다는 뉴스가 뜨면, 인터넷으로 욕설을 쓰며 쾌감을 느끼는 누리꾼에서,

 막상 길에 나서면 장애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흑인을 보면 킥킥거리는 시민들.......

 

 

 

 이 책 속에서 이런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내 머릿속을, 또는 바로 현재를 휘저으며 머무르고 있었다.

도무지 어떻게 바뀔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절망했다.

 

 

 

 

 

  반면, 이런 모멸감을 주의하고 예의를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잘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실수도 있다.

 

 바로 동정의 부분에서이다.

 

  나는 길을 걷다보면 그게 싫었다. 길에 장애인이나 흑인, 또는 눈에 띄는 옷차림의 사람이 있기라도하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그곳으로 쏠린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일부러 사람들이 쳐다보는 쪽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특히 내가 사는 곳이 지방이다 보니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최근에 강연을 들으러 서울에 갔는데, 직접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걸어다닌건 처음이었다.

그곳이 좋았던 것은 조금 튀는 옷차림을 해도, 외국인이 지나가도 빤히 쳐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속으로 갈구했던 그것이 사회학에서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되었다.

 

 

 물론, 지나친 무관심도 사회 파괴의 근원이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데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 벌어지는 범죄의 참극들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의 예의 바른 무관심,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할 때 도울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은 곧 별개로 구분지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도 있다.

 138, ‘공동체의 붕괴, 집단주의의 지속을 읽다보니,  2016년 그랜드마스터클래스 철학자 이진우의 강연이 저절로 떠올랐다.

  우리나라 상황은 탈전통화되고 있다. 탈전통화는 자기창조, 잠재력이 증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개인이 아닌 집단이 지배를 하고 있다.

교수님은 이 모순을 비판했다. 우리나라는 성공의 전략이 집단주의이다. 그리고 연고주의가 판을 친다. 이것은 변질된 집단주의.

 

 관계로 고통당하면서도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개인의 생산성을 갉아먹는 또다른 한국병이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기주의는 집단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걸 집단이기주의라고 하지 않는가? 집단이기주의는 개인에게 자꾸 모멸감을 가한다.

 

 

 

 

우리가 고쳐야 할 것에는 이것도 있는것 같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누군가가 모멸을 가한다. 내 생각에 어어,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간다.

 저 사람은 직분에 높대잖아. 그럴수도 있지. 하는 말에 이건 아닌데..’하지만 묻혀간다.

나의 논리적 사유로 아니라고 판단되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 같다.

 

 

 

 

뭐, 결론은 이거지. 나부터 잘하자.

 

 나는 이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해놓고선 겁이 많아서 가만히 있던적 많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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