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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이하 <실프>)이라니 제목이 길다. 원제는 소설 속 형사의 이름과 같은 <실프Schilf>다. 실프는 또한 갈대라는 뜻이다. 갈대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존재다. 바람은 한 곳에서만 불어오는 게 아닌 만큼 갈대 역시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
<실프>는 갈대의 움직임처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소설이다. 초반에 일어난 리암유괴사건을 보면 추리소설 같기도 하고, 시간여행자의 살인사건을 구경하다보면 SF소설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제바스티안과 오스카의 대화를 보면 교양과학소설인가 싶다. 그런데 실프가 사색하는 내용을 보면 이런, 관념소설인가? 이처럼 <실프>에는 하나의 장르로 확정짓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소재가 들어있다. 치정살인, 질투, 물리학, 추리, 심리. 그러나 이것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시간’이다.
이 소설에서 물리학자 제바스티안과 그의 친구 오스카는 서로에게 하나 밖에 없는 중요한 존재이면서도 대립적인 관계이다. 제바스티안은 여러 개의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평행 우주 이론’을 믿는다. 반면에 오스카는 단 하나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물질을 찾아내려 하며 ‘만물 이론’을 주장한다. 그러다 제바스티안의 아들 리암이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가는 길에 유괴당하고 제바스티안은 “다벨링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실행에 옮긴다. 한편 이러한 사건에 참여(?)하게 된 노형사 실프는 자기만의 수사방법을 이용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줄거리를 보고 이 소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헐리우드식 스릴러라고 판단하면 오산이다. <실프>에서 다루는 내용은 주로 물리학이나 시간이지만 <실프>가 그려내는 철학은 삶의 본질이다. 작품은 수많은 확률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 중 몇 가지의 모습만을 보여주지만 그 모습들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 <실프>에서 나타나는 선택의 순간, 그것은 행복이 산산히 부서지는 과거를 후회하게 만든다. 뒤늦은 후회 속에서 사람이 사는 삶이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작가 율리 체는 특유의 은유로 작가의 사유를 작품 속에 녹인다. 쉽지 않게 건진 문장을 곱씹어 본다.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어.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는 이 둘을 잘 구분할 줄 모른다는 거야.
삶이라는 근간(根幹)에서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구분해야 한다고. 물론 나무에는 수많은 가지가 뿔처럼 솟아나고, 꽃잎이 핀다. 그것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뿌리에 물을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