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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저민음사201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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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남아 있는 나날은 충분해
이야기는 스티븐스가 여행을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랫동안 집사 업무를 해온 그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여행이란 휴식이자 전환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느 집사의 전환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동시에 제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세계적인 전환점도 들어 있는 이야기.
집사, 라고 하면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묵묵하고 무표정하고 절제된 행동이 몸에 배어 있는, 품위의 대명사. 맡은 일은 120퍼센트 매우 만족스럽게 해나가는 가정의 해결사. 그러다보니 집사의 인생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신이 몸담은 집에 있다. 스티븐스는 그러한 집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겸손한 말투로 자신은 그렇게 훌륭한 집사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스티븐스는 누구나 탐낼 법한 집사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주인 앞에서 피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여자, 켄턴에 대해서도 사적인 감정을 품지 않는다. 집사로서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스티븐스, 그렇기에 그는 젊은 날에 지나간 일들을 그리워한다.
스티븐스는 여행을 하면서 지난 날들을 회상한다. 그 회상은 국가적인 사업도 있고 개인적인 업무도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 일어나는 삶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에 사람은 다양한 감정을 갖는다.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설레기도 한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집사인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이 ‘자네 표정이 좋지 않군’이라고 말해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1인칭 시점의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원시원하게 자기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이 대신 그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말해줄 뿐이다.
하지만 점차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이야기의 실마리라고 할 수 있는 추억들을 회상하면서 그는 조금씩 변한다. 생각할수록 그가 존경했던 달링턴에 대한 인식은 바뀌어가고, 진실 앞에서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 남아 있는 날 동안 농담을 하면서 지내겠다고.
이번엔 좀 다른 이야기.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정적이고 긴장감이 별로 없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본소설 특유의 경쾌함대신 중후한 재치가 흐르는 소설이다. 가벼운 흥미를 끌기보다 소설 그 자체로 독자를 이끈다. 게다가 집사 스티븐스의 입을 빌어 드러나는 ‘영국의 집사들’에 대한 디테일을 보면,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집사’라는 인간에 대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해 보자’하는 심정으로 파고든 것 같다. 그것은 곧 어느 직업에 대한 탐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한 인간성,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계급의식, 문화 등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면서도 진중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들을 향한 연구이다.
또한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과연 나는 세상에 일어나는 진실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만일 내가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크나큰 잘못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오랜 시간동안 그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까.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 지금까지 있었던 나를 부정하는 셈이 될테니까.
자신의 의무, 그리고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업적 등이 쌓여갈수록 남은 나날들은 줄어든다. 스티븐스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이것을 알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