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 한국 여성의 인권 투쟁사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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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물학적으로 여자. 굳이 생물학적으로라는 말을 붙인 것은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성()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로 살아가는 동안, 특별히 차별받았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결혼하기 전에는. 1960년대 생인데도 딸 아들 차별 받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부모님의 사랑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냐마는 나의 아버지는 우리 딸들에게 늘 따뜻했다. 옛날이야기도 들려주고, 공부할 때는 옆에서 연필도 깎아 주었다. 겨울에 옷을 갈아입을 때면 속옷을 아랫목에 넣어두었다가 입도록 하였다. 또 딸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 특히 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척 아꼈다. 나는 세상의 남자들은 모두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이 생각과 이 느낌이 무너져 내렸다. 남편 하나 믿고 낯선 집에 들어가 낯선 사람들과 산다는 것이 만만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시가의 조상에게 제사상을 차리는 것, 집안의 여러 애경사에 참석해야 하는 것 등 등. 결정적으로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호주제'를 실감한 일이었다.

 

 


호적등본을 보니, 나의 아버지의 밑에 기록되어 있던 내 이름에 삭제한다는 뜻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아버지의 이름 밑에 올라가 있었다. 친가에서 호적을 파다가 시가에 옮긴 거다. 출가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첫 직장을 얻고 나서 쓴 인사기록카드에 호주성명 및 관계란에 ‘ooo의 자부라고 기록해야만 했다. 내가 자랄 때 걸음마 한번 가르쳐 주지 않고, 공부할 때 연필 한 자루 사주지 않은 낯선 이름의 어느 남자가 나의 호주라는 거였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딸을 시집보내고 호적에서 삭제된 딸에 대한 서운함과 이에 더하여 쓸쓸해하실 부모님 생각에 더욱 슬펐다. 딸로 태어난 것이 죄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가족관계증명서를 보니, 나를 낳고 길러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모로 선명히 등재되어 있었다. 바로 호주제가 폐지된 것이다. 나는 너무 기뻤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눈물이 났다. 그 호주제가 폐지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이 수고하였는지 강준만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인물과사상사, 2018)을 읽고 알았다. 호주제가 폐지되기까지 반대론자들의 거센 항변이 있었다고 한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사회에 커다란 혼란이 올 것처럼 반대를 고집하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호주제 폐지는 이 땅의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제가 1921년 공포한 조선호적령으로 인해 만들어진 호주제. 그 호주제는 20053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폐지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완전 폐지된다. 200811일부터 시행되는 이 민법 개정안은 페미니즘 운동의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그럼에도 뼛속깊이 새겨진 가부장제는 아직도 우리의 일상 곳곳에 살아 꿈틀대고 있다. 첫째, 언어생활에서 처가와 시댁을 보자. ‘보다 높임말이다. ‘여남보다는 남여가 흔히 쓰인다. 친정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이고, 시아버지에게는 아버님이라고 한다. ‘도련님, 아가씨라는 말은 옛날부터 있어온 말인데, 주인집 자녀에 대하여 하인이 부른 호칭이라고 한다. 둘째, 명절날의 관행을 보면 주로 남편의 집에 가서 차례를 올리고 친정을 가거나 생략한다. 명절 음식 준비는 여성들에게 가장 부담스런 부분이다. 명절도 남성중심으로 행사된다. 셋째, 아직도 남아선호 사상에 젖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넷째, 직장 내에서의 성차별 문제가 있다. 다섯째, 가정폭력 문제가 있다. 이 중에서 나는 가정폭력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고 싶다.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학생들 중에서 친구를 괴롭히고, 분노조절을 못하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을 상담한 결과, 공통점은 가정 내 폭력이었다. 주로 아버지의 폭력. 다행히 자녀를 때리지는 않으나, 부부싸움을 하면서 아내를 구타하거나 집안의 물건을 내던지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내 교직경력이 30년이 되는데, 이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내가 통계를 내지 않아서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하나, 이 사회가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분석이다. 피로사회, 경쟁사회, 감시사회, 등의 사회 경제적 문제들이 주로 바깥일을 하는 아버지들을 힘들게 하고 그 힘듦이 가정 내에서 신체적으로 약자인 아내나 아이들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버지에게 직접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보기만 해도 어린 자녀들은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는다. 그 상처는 성인이 되어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강준만 교수는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에서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우리나라 페미니즘 역사를 보여준다.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여러 사건들이 결국은 성차별, 가부장제의 폐해였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1990년대 김완섭의 창녀론발언, 1996년의고대생 이대 대동제 집단 성폭력 사건’, 2000년 초 된장녀라는 유행어. 2011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 그리고 신안군 여교사 성폭행 사건’, ‘카카오톡 대화방 언어 성폭력 사건’, 홍준표의 돼지 흥분제 사건’, 탁현민의 남자 마음 설명서 사건최근의 미투 운동까지.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이 많은 사건들의 기저에는 성차별, 가부장제 등의 사고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외에도 많은 사건들의 전말에 대하여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다. 내가 지나쳤던 그 많은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제는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겠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피해를 입고 사는 사람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저자가 수집한 자료가 너무 많아서 저자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적게 들린 것이 아쉽다. 저자의 글보다는 인용이 너무 많았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강요된 가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옭죄고 있는 성차별과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게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미국 문화평론가이자 페미니즘 작가인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예로 들었다. 나는 그 책을 읽어 보았다. 거기서 받은 놀라운 사실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착취와 억압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성 할례의 강요, 태국의 섹스 클럽, 아프리카와 인도, 중동, 유럽에서 여성의 히잡 착용 문제, 중국의 여아 살해 등등.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여성에 대한 이러한 굴레를 벗겨줄 사람이 페미니즘 운동가만이어서는 안 된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여남이 같이 해야 한다. 페미니즘 운동은 인권운동이다.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어야 한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을 맺으면서 저자는 말한다. “아무리 가부장제에 찌든 남자들일지라도 저항하는 여성에 대해 처음엔 펄펄 뛸망정 그 저항이 지속되면 익숙해지게 되어 있다. 인류 역사를 보라. 기득권자가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한 적은 없다. 그 알량한 기득권이란 게 오히려 자신의 이익에 반할 경우에라도 말이다. ‘습관의 독재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중략) 오빠도 누이를 돌보는 책임과 고통에서 해방됨으로써 지금보다는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빠의 해방,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목표다. 오빠들이 자신들이 허락한 페미니즘의 속박에서 벗어나 누이가 허락한 페미니즘, 아니 상호 소통하는 페미니즘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자유와 광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빈다.”(371) 라고 하면서 페미니즘운동의중단없는 전진을 역설한다.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영주의 <며느리 사표>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여자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을 가슴으로 읽어 보시라. 남자의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가부장으로서 볼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읽어 보시라. 그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참고 견디고 저항해야만 했던 힘든 시간을 상상해 보시라.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은교>(문학동네, 2012)(251쪽) 이 말은 노인을 천대하고 늙음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젊은이의 잘못된 시각을 꼬집는 말이다. 그렇듯이, 남성으로 태어나 남성중심 사고에 젖어 여성을 차별하고 지배하려는 남성에게 말하고 싶다. 남성들의 노력으로 남성이 된 것이 아니고, 여성의 과오로 여성이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연일 뿐이다. 남성들이여, 당신들의 어깨에 짊어진 가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여성과 함께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생각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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