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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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 쓴다는 것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문맹>(한겨레출판, 2018) -

 

                                              

201881일 경향신문(인터넷)상해임시정부도 정치적 난민이 세운 망명정부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청와대는 1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 신청허가 폐지청원에 대해 대한민국이 법통을 계승했다고 헌법에 명시된 상해임시정부도 일제의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정치적 난민이 수립한 망명정부였다우리도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난민 문제를 논의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중략)

714875명이 참여한 이번 청원은 최근 예멘 난민 신청이 급증하면서 사회 갈등을 우려하는 동시에 불법체류수단으로 악용되는 무사증제도와 난민제도 등에 대해 검토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같은 날 인터넷 검색 결과, 제주도에는 예멘 난민 500여 명이 난민 신청을 하고 심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2015년부터 시작된 예멘 내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각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중이다. 이 사태에 대해 우리 국민들도 의견이 찬반으로 엇갈린다. 우리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볼 때, 받아들일 만하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치안, 종교, 문화 등에 대한 걱정이다.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17’에 따르면, 체류 외국인은 꾸준히 증가해 2016년에는 200만 명을 넘어섰다. 결혼이민자 규모는 지난 2013117007명에서 2016121332명으로 4,325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이후로 국제결혼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우리 나라는 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주로 베트남, 필리핀 등의 아시아 여성들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면서 다문화 가정이 형성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갖고 있다. 학생의 양육을 주로 담당하는 어머니는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을 하고, 자녀의 학교생활을 잘 돌보지 못한다. 특히 초등 저학년 때, 한국어를 습득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녀에게는 한국어가 모국어이지만, 자녀의 어머니에게는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모국어는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언어요, 사람의 정체성 형성에 큰 구실을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했다. 존재는 언어라는 집에서 산다. 인간 존재는 다른 인간 존재와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생각하며 언어로 문화를 이루며 언어 속에서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국어를 잃게 된다면 삶에 커다란 장애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인생 역정을 글로 풀어낸 작가가 있다. 바로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헝가리 출신의 소설가다. 그는 193510월 헝가리의 시골마을인 치크반드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빈곤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공 의거이다. 스탈린 체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시민 봉기로서, 소련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으나 그 뒤에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반스탈린화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혁명의 여파를 피해 반체제 인사였던 남편과 함께 21살의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네 살 된 딸을 데리고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이주한다. 그러면서 독일어, 러시아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접하게 된다.

그가 2011년 스위스에서 일흔다섯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동안,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 <50년 만의 고독>을 완성한다. 3부작은 우리 나라에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출간되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은 모국어를 깨우친 네 살부터 모국어를 잃고 문맹이 되었던 삶을 말한다. 문맹에서 벗어나고자 스위스의 공용어인 프랑스어를 배워 첫 소설을 쓰기까지의 자전적 이야기다.

 

저자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이주한다. 헝가리어를 잃고 프랑스어를 배운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고 느낀다. 프랑스어로 글을 쓰고 읽는다지만 그는 자신이 프랑스어권 사람으로 통합되거나 동화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모국을 떠나면서 가난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대가로 외로움과 고통을 겪는다.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82)

 

단순한 외로움과 고통이 아니라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사막으로 여긴다. 풀 한 포기 살기 어려운 사막. 정체성을 잃은 존재는 사막 속의 작은 생명처럼 힘겹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89)

 

새로운 정착지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워 글을 쓰면서도 그는 절망한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89)

 

저자는 이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글을 쓴다.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느끼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97)

 

저자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기 위해서 다시 언어라는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작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103)

 

저자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것을 운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문맹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113)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까치, 2017)에서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신념을 들어보자. 이 글은 작가 지망생이던 빅토르가 주인공 루카스(실제로는 저자)에게 하는 말이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302)

 

<문맹>은 글을 읽는 것에 대한 일을 비실용적인 일이라는 의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태어나, 전쟁과 독재 치하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잃고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 한 사람의 기록이다. 어디 저자뿐이었으랴.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억압과 속박 그리고 혼란 속에서 가족은 해체되고 인간의 이성에 따라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글을 쓰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간 한 인간의 삶이 오롯이 보인다. <문맹>의 문체는 매우 건조하다. 문장이 짧다. 수식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행간에는 저자의 절망, 고독, 희망, 도전이 견고하게 숨어 있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리라.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는 현대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읽고 싶은지도, 무엇을 읽고 써야 할 지도 모른 채 헤매는 현대인들은 정신적 난민이 아닐까. 정신적 난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문맹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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