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올리버 색스 평전
로런스 웨슐러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유로운 영혼, 올리버 색스 박사의 전기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로런스 웨슐러 지음
양병찬 옮김

알마

뉴요커의 작가인 저자가 1981년부터 색스가 사망한 2015년까지 34년간 교류 하면서 직접 듣거나 주변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 같이 겪은 일들을 기록한 올리버 색스 평전이다.

1981년 6월 색스를 처음 만났을 때 적은 저자의 노트를 잠깐 보자.
”색스는 덩치 크고 건장한 사람으로, 개구쟁이처럼 폭풍질주하는 버릇이 있고, 가슴은 우량아의 것처럼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감정 표현과 자세는 종종 어린아이처럼 어슬프기 짝이 없다.... 그는 팩트를 존중하여, 과학자 특유의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따르면, 팩트는 내러티브 속에 깊숙이 박혀 있어야 하며, 내러티브에 의해 통합되어야 한다 그는 내러티브, 특히 사람들의 내러티브에 진짜로 중독되었다.“

일반의인 아버지, 당대 유명한 외과의사인 골수파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자란 색스는 내성적인 어린이였다.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사립학교와 옥스포드를 다니면서 문학, 철학에 심취한 그는 미들섹스에서 인턴을 마치고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간다.

"캘리포니아의 머슬비치에서 놀던시절, 그는 닥터 스쿼트 또는 닥터 퀴즈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제일 강력한 다리를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가 무려 270킬로그램을 들어올려 캘리포니아주 역도챔피언을 따낸 장면이 담긴 사진을 증거로 제시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모터사이클, 근육운동으로 육체를 강인하게 하는 한편 동성애에 빠지고 LSD, 암페타민등의 마약에 빠져들기도 한다. 본인의 말로는 마약중독은 자폐성 성해방 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본연의 일은 게을리하지 않아 1965년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미국신경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 여러 학자들의 주목을 끌어 뉴욕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대로 가게 된다.
뉴욕으로 가면서 문란한 성생활은 끝났지만 약물중독은 얼마간 지속되다 중요한 실험의 재료를 모두 잃어버리는등 여러 문제로 베스에이브러햄 병원으로 전출되면서 약물과도 멀어지게 된다.

"가장 추악한 환경(두통 클리닉과 베스에이브러햄)에서 이를 악물고 노력한 끝에, 나는 '위대한 의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신경과 의사'로 버려졌어."
이제 더 이상 갈데가 없는 마지막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병원에서 오직 명예욕에 눈 먼 상사와의 갈등 속에서도 병자체만 치료하려는 다른 의사와는 달리 환자에게 자기가 앓는 질병이 뭔지를 먼저 설명하고 환자에게 의지, 용기등을 들려주어 치료하는것이 색스의 목표였다.

"엘도파의 가격은 여전히 턱없이 비쌌지만, 나는 '이번에야말로 꼭 시도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브록헤이븐 등의 연구소에서 쏟아져나오는 '기적의 치료법'에 대한 자아도취적 보고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금믈이었어...지나친 낙관론의 부작용은 단순한 부작용보다 더욱 심각했고, 증세가 위중한 환자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어. 우리가 어떤 판도라 상자를 열게 될지 미지수였어."
당시 파킨슨병에 대한 치료로 엘도파의 효능이 널리 알려졌고 특히 1962년 브룩헤이븐에 있는 코치아스의 연구실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색스는 사재까지 털어 연구준비를 해, 1969년 임상실험을 시작한다. 섹스와 마약을 끊고 진지한 자세로 연구에 몰입하지만 한편으로는 엘도파의 효능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여러 연구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자아도취적 보고서에 회의를 느낀다. 올리버의 염려대로 엘도파 투여 초기에 극적인 깨어남의 기적을 연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꼬리에 꼬리를 문 부작용으로 병동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 당시 경험과 치료 기록을 토대로 '깨어남'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대 놓고 무시했다.과학적인 데이터나 통계 분석도 제대로 되 않은 책이라는 이유다. 과학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올리버를 잘못 안것이다.병자체만 보고 치료 하려는 대부분의 다른 의사와 달리 올리버는 환자 자체를 본것이다. 환자와 공감하면서 인격체로서 대한 결과 전문가들은 소설이라 폄하하는 치료 기록을 남긴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의학문헌에는 이런 비개인적이고 숭고한 감정이 누락되어 있어.과거에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감정이 훨씬 흔했는데...고양된 수준은 아닐지라도 진정한 수준으로 존재했어."
올리버의 논문, 연구, 인생의 중심에는 개인적이 아닌 '뭔가 비개인적이고 예술적이면서도 전인격을 지향하는 이러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진정한 의사들이 환자를 마주할때 이런 감정을 느끼길 그는 원한다.

"어느 날 밤 제임 구달과 그녀의 침팬지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동안, 올리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해묵은 딜레마(임상적 태도와 박물학적 태도 사이의 전쟁)가 명백히 드러났다. 그것은 한마디로 '과학적 거리, 보류, 관찰'과 '공감, 정서, 쓰다듬음' 간의 대립 이었다."

완고한 유대 가정에서 성장한 올리버에게 마약, 동성애 등은 억압의 틀을 벗어나려는 자아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으로 교우 관계가 다양하진 못했지만 뜻이 맞는 몇 명의 친구와 문학, 철학, 화학, 생물을 다양하게 섭렵한 청년기는 과학의 도구로만 환자를 치료하는 대부분의 의사들과 달리 병자체 보다 병을 앓고 있는 인간 자체를 관찰하고 환자와의 공감을 통해 치료하는 어떻게 보면 별종의 의사가 된 토대였을것이다.

오로지 학업에만 몰두해야 의대를 진학할 수 있고, 낙제를 면하기 위해서는 족보의 암기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의과대학.
졸업해서는 돈이 되는, 아니면 힘들지 않는 과에만 몰리는 의사들을 보면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가까운 미래에도 올리버 같은 의사를 대한민국에서 만나기는 로또 일등 당첨보다 어려울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