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원태연 필사시집
원태연 지음, 히조 삽화, 배정애 캘리그래피 / 북로그컴퍼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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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거꾸로 들고

끝에서부터 읽는 책.

 

필사시집.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요즘에는 필사시집이 조금 인기가 있는가 보다. 윤동주 시집 같은 오랜 고전 시집도 필사시집으로 나오는 것을 보니. 그러고 보니 손으로 펜을 잡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거리감이 점점 쌓이던 게 맞다. 누구도 그것에 대한 지적을 하지 않았지만, 손으로 써내려가는 일기만큼 커다란 재산이 없던 시절의 기억을, 모두 워드 작업으로 바꾸어 가제본해낸 뒤라야 '책' 같다고 좋아했던 것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누군가의 잘 된 글을 베껴쓰는 일을 해서라도, 손에 글자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대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니고서야, 워드로 나온 글자모양이 서로간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사회생활 하는 모든 이들은 알게 되었기에, 손글씨가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예쁜 책의 한 면을 장식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니 더욱 부담감이 앞선다. 책에 아무런 상처 하나 없이 읽고 간직하는 것을 즐기는 입장에서 책에 무언가를 쓴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비록 이미 예견된 공간을 채워 시인의 詩를 필사하는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어렵다.

 

취미

니가 내 취미였나 봐

너 하나 잃어버리니까

모든 일에 흥미가 없다

뭐 하나 재미난 일이 없어

 

원태연 시집. 국내 시집 판매량 600만부로 1위를 기록한 신화같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시인. 태연의 <쉿>, 백지영의 <그 여자>의 작사가. 18년 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30편의 시를 더해, 기존의 시 70편과 함께 발매한 시집이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이다. 가볍지만, 흔하지만, 현세대의 감정을 가장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들. 전화와 관련된 사랑의 언어들, 그리고 아픔들. 젊은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가장 깊은 공간의 언어를 쉽사리 발견하겠고, 기성세대는 아련한 과거의 어느 순간이 떠올라 마냥 편하게 읽기는 어려웠을 진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곳곳에 실린 원태연 시인의 필사 부분이 예사롭지 않다. 설명하지 않아도 꾸밈없이 쓴 글자라고 알만한 글씨다. 오히려 편하고, 정감하고, 다시 보고픈 필사다. 좀더 용기를 내서 나머지 부분도 독자들 자신의 개성있는 필사로 채워보라고 재촉하는 듯도 보인다.

 

가을을 닮은 시집의 표지 그림이다. 가을이 가득한 공원 한 어귀에서, 기타를 치는 남자와 듣고 있는 여자, 그리고 느긋한 오후의 한 때를 즐기는 개 한 마리가 보인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을 법한 추억이 담겨 있다. 우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가? 아니면 철 없었지,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현실에 다시 매몰되는가? 아마도 전자인 때도 있고, 후자인 때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조금 여유로우면 함께 멈추어 서서 공감하다가도, 현실의 무게를 버거워하며 정신 없이 지낼 때면, 피식 웃고 넘기고 할 것이다. 그래도 추억은 언제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조급할 것 없다. 언젠가 현실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져서 그 시절의 나와 마주앉아 그 시절 즐겨듣던 음악을 꺼내 들을 여유가 좀 생기면, 다시 그 속에서 함께 즐기면 될 터이니 말이다. 그런 시간이 허락된 날이면, 원태연의 시집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다시금 꺼내들어도 제맛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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