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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 16세기와 17세기의 마법과 농경 의식 역사도서관 2
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음, 조한욱 옮김 / 길(도서출판)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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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밤의 전투>가 출간되었다.

신문화사 계열의 역사서를 주로 번역 소개해온 한국교원대학의 조한욱 교수가 옮긴이. 지금껏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글은 단행본 하나(<치즈와 구더기>(문학과지성사))와 <미시사란 무엇인가>(푸른숲)에 수록된 몇 편의 논문이 고작이었다.

새로운 역사서술의 흐름을 규정지을 때 흔히 우리는 "미시문화사"라는 용어를 쓴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의 미시사와 영미의 신문화사라는 두 역사학 이론에서 공통되는 부분을 표현한 말이다. 공통되는 부분,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학문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두 역사학계에서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의 교집합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방법론에 대한 이론적 고찰과 같은 추상적인 담론에 몰두하는 연구자가 아니라 역사에 관심 있는 범용한 독서인이란 전제 하에 말하자면, 이 책을 접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미시사가 얼마나 엄밀한 학문적 방법론에 입각해 있는가를 살펴보려면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글을 읽는 것이 최상이다. 미시사와 신문화사 사이의 접점인 "아래부터의 역사학"이란 모토는 사실 그 둘만의 공통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포괄적이고 성근 개념이다.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계량, 수치, 통계에 집중했던 역사학의 흐름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면서도 역사학의 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이런 장점을 지닌 책이 바로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종교학, 인류학, 민속학, 정신분석학 등 분과학문의 벽을 넘나드는 서술의 묘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것이다. 이 책의 서술을 보면서 바흐친의 민중적 세계관이 생각났고, 오에 겐자부로 소설에 등장하는 잡종적 인간들(예를 들면, "타오르는 푸른나무"의 주인공인 성전환자)이 떠올랐다. 민중적 세계에 대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견해는 서구역사에 대한 나름의 반성이라 할 수 있다.

질서정연한 고등종교인 가톨릭(정통 그리스도교)이 민중의 토착적 세계를 어떻게 잠식해 들어갔는가를 잘 보여주는 수작이 바로 <밤의 전투>다. 우리 발밑 깊숙한 곳에는 오래전에 용솟음쳤던 물길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비학적인 세계와 이단적인 세계의 역사가 사멸하는 순간 근대성의 미약한 첫울음이 들리기 시작했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아직 이 세계의 마법은 풀리지 않고 있다. 여전히 우리 가난한 이들은 믿음을 지푸라기처럼 붙잡고 산다. 옛날에도 그랬듯이! 주술과 마법의 세계에 살아가면서, 생산성과 풍요를 갈구하던 민중세계의 풍속을 기묘한 기하학적 무늬의 만화경처럼 펼쳐내는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솜씨가 감탄스러울 뿐이다. 이 책은 그의 처녀작이다.

1989년 대작 <밤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있는 긴즈부르그의 관심사, 마법과 주술사, 마녀들의 집회 등 민간신앙에서 유럽문화의 본질과 문명의 본질을 캐내는 뿌리로의 탐색, 그 드넓은 세계로 나가는 첫번째 관문인 셈.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짚고넘어갈 것 한 가지.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 나는 외래어인명표기법의 용례에 준해 '긴'이 아닌 '진'으로 알고 있었는데, 옮긴이인 조한욱 선생께서 직접 답변을 주셨다. "카를로 긴즈부르그!"  이게 맞다는 말씀을. 옮긴이 조한욱 선생께서 직접 당사자에게 확인한 바 있다고 하신다. (저자 긴즈부르그가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는 당부까지 했다고 한다). 외람되게도 선생의 이탈리아어 실력까지 의구심을 가졌으니 무식이 지나치면 용기가 아닌 만용이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한 수 배웠으니, 그럼 다시 쓰자. 국내에 출판된 카를로 '진즈부르그'란 표기는 실제 불려지는 것과는 상관없는 국내용 이름이라고. 프레드릭 제임슨(프레드릭 제머슨)이 국내에서만 통용되듯이. 하지만 당사자가 들으면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매너있고 바람직해 보일 것. 그러니 "카를로 긴즈부르그"라 정확히 부르자. 그리고 이 책은 오랫동안(10여 년) 카를로 긴즈부르그 문하에서 공부한 긴즈부르그 제자인 이경룡이란 분의 눈과 손을 통하는 검토 감수과정을 세밀히 거쳤다고 한다.

역사학 전공자가 착오를 줄이기 위해 겸허히 자신을 내어놓은 모범적인 사례라 생각된다. 학술서에서 감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웬만한 사람은 잘 알고 있을 테니.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전후과정이 얼마나 지난하던가. 옮긴이부터 편집자까지 모든 이의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으니 그걸 잊지 말자.

각설하고, 역사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읽어도 그리 어렵지 않은 흥미진진한 세계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으니 겁먹지 말고 펼쳐읽자. 책을 펼쳐 마법과 주술이 생생히 살아 있는 중세 이탈리아의 농촌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내일은 목요일. 어두운 들판에 나아가 회향풀을 손에 든 베난단티들이 수수를 든 말란단티들과 치열한 밤의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베난단티들이 이겨야 이 겨울의 경제불황이 끝날지 모른다. 베난단티의 승리가 풍요와 다산을 가져오기에.

번역본의 표지디자인이나 본문의 레이아웃 등 공들여 책을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명저에 걸맞게 성정을 들여 책을 꾸민 길출판사의 노력에도 격려의 박수를. 길출판사에서 준비중인 다른 인문학 명저들이 속속 출간되길 기대해본다. 특히 벤야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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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별 2009-07-2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국문학과 대학원생.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있고, 지금 논문을 준비중이며, 내년 1월이면 발간됩니다. 평소 문학만이 아니라 연극이나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 대중 서사 장르에 무지 관심이 많습니다. 이 작품은 뮤지컬을 전공한 승연언니로부터 여러 차례 얘기를 들어왔어요~ 그럼에도 논문이 핑계가 되어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오늘, 당장 오늘부터 응모하는 이 뮤지컬 이벤트가 눈에 확 들어오고, 그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게다가 화요일이라면, 저번주부터 시작한 엄마와의 요가 교실 수업이 없는 날, 이거이거 딱 제 이벤트네요 ^^ 집이 안산이라, 맘 먹지 않으면 대학로까지 가기 어렵습니다. 갈 마음은 충분한데, 게다가 저희집은 4호선 라인인 안산!! ^^ 그 맘 좀 먹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엄마랑 같이, 요거요거 보고 싶어요. 제 돈 주고 제가 예매하는 것은, 아무래도 별다른 계기가 없으면 지금처럼 논문 쓰는 상황에서는 마음먹기가 잘 안되지만, 평소 애용하는 알라딘이 초청해주는 거라면, 마음 그냥 먹고, 엄마 손 잡고 달려갑니다. 네네~ 그럼요, 달려갑니다 ^^
 
 전출처 : 바람구두 > 대중문화란 이데올로기의 배틀 그라운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 문화교양 2
존 스토리 지음, 박모 옮김 / 현실문화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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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문화이론을 개괄하는 입문서이다. 이 방면의 개론서로 이 책을 포함해 김정은의 "대중문화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를 포함해 모두 4종을 읽었고 다른 책들에 대해선 차례차례 서평한 바 있으니 문화이론 입문서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은 대체로 읽은 셈이다. 그러니 혹자는 그렇게 묻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어느 걸 읽는 것이 가장 좋으냔 의문을 품을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엇을 읽든 별상관없을 듯 싶다. 대체로 4종의 책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김정은의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는 난이도면에선 가장 쉽지만 쉬운 만큼 간추린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른 책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물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루카치, 벤야민, 하우저 등의 다른 저작들을 읽은 분이라면 도리어 그것이 굉장한 장점일 수 있다).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앞서 김정은의 책에 비해 심도 있는 접근을 꾀하고, 국내 상황을 함께 다룬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문보다 문장이 난삽하고, 어떤 예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단점을 지닌다. 그에 비해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는 문장이나 기타 한국적 상황들을 다룬 점에서는 원용진의 책보다 뛰어나지만, 해외이론 소개 편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을 가진다. 이에 비해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비록 부분적으로 문장이 어색한 부분은 있지만, 원용진의 것보다 어떤 면에선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문장도 상대적으로 덜 난삽하다. 게다가 한국적 상황이나 예시를 고려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서구의 문화이론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려는 목적으로 읽기엔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4종의 책을 모두 읽을 까닭은 없지만, 어느 한 종만 읽기 보다는 2종 정도를 서로 대비해가며 읽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다.

이 책의 원제가  "An Introductory Guide to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인데 영어명이 의미하는 바는 '대중(긍정적 내지는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한 예비(입문)단계의 가이드'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에 대한 입문서'란 뜻이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이 책의 목차는 그대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공부하는데 가장 적절한 커리큘럼이며, 다른 입문서들도 그 순서나 내용 배치면에서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배치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장 대중문화란 무엇인가"에서는 대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대중문화는 "대중+문화"가 합쳐진 말이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알기 위해선 먼저 문화가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윌리엄즌는 문화를 넓은 의미에서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인 과정, 2.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 방식, 3.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 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존 스토리는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이데올로기를 지목하고,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정의와 쓰임새를 소개한다.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단일한 용어로 표기하지만 영어 표기에서 대중문화는 mass와 popular로 구분된다(이에 대해선 전에 다른 서평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이어 "2장 문화와 문명의 전통"에서는 우리에게도 뿌리깊이 고정되어 있는 문화 관념인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충동을 이야기한다. 19세기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 산업화와 도시화로부터 비롯된 대중의 출현은 그동안 고급문화의 생산자이자 주된 소비자였던 사회의 상층계급을 크게 긴장시킨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 출현한 여러 미디어들(당시엔 주로 신문, 잡지였으나 점차 대중교육의 확대, 라디오, TV의 출현 등)로 인해 소위 대중들이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이에 대해 매튜 아놀드 등을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은 대중문화가 문화 전반에 걸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보았고, 이를 분리하거나 대중들을 계몽하여 고급 문화의 향유자로 변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런 논쟁은 매튜 아놀드 이후 리비스주의로 넘어가면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전세계로 널리 전파된다. 이를 통해 문화를 고급문화와 대중(저급)문화로 구분하는 이분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과연 문화의 고급과 저급을 구분하는데 대중이란 잣대가 적당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존 스토리는 영국 출신의 학자인 까닭일까? 우선적으로 문화연구의 여러 경향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영국의 버밍엄대학 현대문화연구센터의 학자들이 일군 "문화주의"를 3장으로 끌어낸다. 마르크스주의를 먼저 끄집어낸 다른 책들과는 약간 다른 점인데, 헤게모니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의 이런 구분은 나름대로 적당해 보인다. 문화주의는 영국 피지배계급의 역사적 경험을 정리하면서 전개된다.1950년대 말엽부터 주로 영국의 이론가들(Richard Hoggart, Edward. P. Thompson, Raymond Williams, Stuart Hall)에서 부각되기 시작한(영국의 문화 연구는 전후 영국의 특수한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자본주의적 산업 생산 양식의 부활, 복지 정책의 수립, 그리고 동구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구 세력의 결집 등으로 인해 변모하는 영국적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전쟁 전의 영국과는 단절된 듯한 변화들, 현대화 및 미국화된 대중문화,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이나 이데올로기가 중류계급과 차별성이 없어지면서) 연구 전통이다. 문화주의의 핵심적인 전통은 문화의 수동적 소비보다 능동적 생산, 즉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대립되는 특징을 가진다.

사회변혁의 주체인 노동계급이 즐기는 대중문화가 노동계급 형성 및 유지에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논의하려 했다. 문화주의에 속하는 이들은 대중문화의 주체인 대중을 새롭게 해석하여, 대중이 수동적이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했다. 문화주의자들이 말하는 피지배계급은 단순히 계급적인 축(항상 노동계급 이상의 의미를 지님)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문화라는 영역은 물질적 토대에서 상대적인 독립성을 누릴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물질적 토대에 개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주의는 구조보다는 인간에, 이데올로기보다는 인간의 경험에, 지배계급의 전략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전술에 관심을 갖는다. 문화주의는 대중이 문화적 실천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적 영역을 구축해가는 능동적인 모습을 찾으려 시도한다.

4장에서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다루고 있다. 구조주의는 이론이면서 동시에 방법론이기도 한 학문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규칙과 개념을 기초로 다양한 문화분석에 적용되어 많은 성과를 낳았으며, 현재까지도 문화분석 툴로써 여러 비판들이 있으나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구조주의의 이론적 경향을 보여주는 특성은 한 마디로 ‘구조(structure)’라는 말 자체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란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적 현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면서 그 표피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나 행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인 원리나 체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조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어떤 문화적 텍스트나 행위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텍스트나 행위의 내부적 혹은 외부적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즉 구조)에 의해 그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현상이 바로 언어다. 서로 다른 언어의 선택, 서로 다른 방식의 언어 배열은 서로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가 현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구조주의적 입장에서의 문화 분석 1) 문화적 표상이 특정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고 2) 문화적 표상이 의미를 내는 방식 - 의미 체계 -를 분석하고, 3)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즉 주체 형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이 책에서는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와 롤랑 바르트를 소개하면서 구조주의 이론이 어떻게 미국 서부극 장르에 숨겨진 신화를 드러내는가 실례(윌 라이트)를 통해 보여준다.

5장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문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은 문화론이라고 명확하게 내세운 하나의 이론 체계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이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이론도 없다. 마르크스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진술을 남기고 있는데, “토대-상부구조의 문제(base and superstructure)”의 문제 - 사회를 이루는 두 요소, 즉 경제적 기초(토대)와 사회적 의식의 모든 형태들인 상부구조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로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에 있어 문화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문제의 핵심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determination)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있다.

경제결정론(기계론적 결정론, 속류 마르크스주의) - 상부구조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는 아무런 자율성을 지니지 못하며 단지 토대가 되는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반영이론(reflection theory), 모든 문화는 그것을 생산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일 뿐이다. 대중문화의 의미는 단지 그것을 생산한 경제구조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예술성보다 구호성을 강조했던 프롤렛쿨트(proletkult)같은 교조적인 예술론도 이런 기계적 결정론의 맥락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기능; 권력을 지닌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포장하는 이념이다. 지배계급에 의해서 생산되는 대중문화의 내용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대중들이 계급적 갈등과 불평을 느끼지 못하는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계급이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대중문화를 즐기게 된다. 계급문화론, 이데올로기는 계급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는 역할과 지배방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문화적 텍스트(종교, 법, 도덕, 관습, 책 등)는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반영물이다.

여기에 루카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알튀세르의 주요 개념들, 그리고 문화주의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한 데 아우르고, 아우를 수 있는(개인적인 생각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두루 설명하고 있다.

사실 6장에서 다루는 "페미니즘"은 구조주의 직후 내지는 7장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나왔어야 적당할 수 있을 듯 싶다. 페미니즘의 정치학은 몰라도 페미니즘 문화학은 확실히 이들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크다. 페미니즘은 대중문화 속에 숨겨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구조를 분석해낸다. 8장은 문화연구의 전체적인 부분을 다룬다. 여러 이론들엔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며,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 완벽한 분석틀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문화를 옹호하려는 측과 대중문화를 비난하려는 측 사이에 벌어지는 오랜 논쟁의 결과인 듯 싶다. 문화이론를 어떻게 바라보든 문제는 한 가지다. 대중문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전의 장이며, 이 싸움은 계급 혹은 문화적 이질성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거란 사실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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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je0525 > 독자반응비평
독자반응비평
차봉희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독문학자인 차봉희 교수가 독일 문예학의 중심적인 이론으로 자리잡은 독자반응비평을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편역한 저서이다.

역시 독일의 관념 철학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루카치가 헤겔의 철학에 영향받은 것처럼 볼프강 이저 또한 후설의 현상학에 영향받으면서 잉가르덴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독자의 주체적인 능동성을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러시아 형식주의 자들의 낯설게하기나 프라하 학파의 탈자동화 그리고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를 떠오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전통 미학은 독자 반응 이론의 모범적인 예가 될 수도 있을 듯 한데...

저자의 허구화와 이에 상응하는 독자의 상상작용을 통한 심미적 체험인 텍스트의 구체화를 미결정적 공백의 채움이라는 능동적 독서행위로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잉가르덴의 수동적인 독자론을 비판하고 또한 독자가 주관성에 함몰되는 것도 경계한다.

텍스트와 작품의 구별, 유희과정 혹은 응고화 과정으로서의 독서 과정에 대한 설명 그리고 허구에 대한 천착을 통해 사실적 체험으로서의 텍스트 체험을 설명한다. 바르뜨의 '텍스트의 유희', '저자의 죽음'론도 독자 반응비평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나 작품에 주어졌던 과도한 관심을 독자에게 분산 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반응비평의 의의가 있고 더이상 텍스트는 한가지 중심적 의미를 가진 수수께끼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주의적인 전범으로서의 작품은 지양되는 것이다.

진리의 인식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한 포스트 모던한 분위기가 독자 반응 비평의 이면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을것 같다.

문학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리의 인식으로 수렴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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