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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평점 :
고통과 씨름하다
토마스 G. 롱, 장혜영 역
새물결플러스
기독교 설교학자 토마스 G. 롱의 책, ˝고통과 씨름하다˝는 세속화된 시대가 마주하는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자연현상의 인과현상이 낱낱히 밝혀진 현대에도 굳건히 자리잡은 신앙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이 몇 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언제나 무고한 고통과 얽혀 있다.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신은 선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전능하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세상에는 이토록 악이 만연한가?` 고통에 대한 문제는 신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설교자들(질문에 대답해야 할 신자들)을 예상 독자로 설정하여 이러한 문제의 묶음에 대한 답을 풀어준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과학이 신의 이름으로 설명되던 것들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렸다. 하늘에서 치는 번개와 몰아치는 폭풍우는 수학의 원리와 과학의 법칙들로 설명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악이 신의 징벌 혹은 연단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이제는 심리학적으로, 신경과학적으로 풀어헤쳐진다.
여전히 신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쓰나미가 몰려오고 허리케인이 도시를 집어삼킨다. 온갖 생명이 그 앞에서 사라진다. 구원의 노래와 기도를 신께 올리는 사람 역시 피해가지 못한다. 연약한 어린 목숨도 견뎌내지 못한다. 이제 신은 세상의 고통을 해명해야 한다. 악에 대해서, 그리고 무죄한 피해자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신이 해명할 의무는 없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신자들에게 속해 있다. 다시 말해 신의 이름 아래에서 자라난 문명은 과학과 무고한 고통과 마주하며 세계관의 위기를 느낀다. 그리고 이 위기를 해소해야 할 의무는 신자들에게 있다. 이는 신자들에게 이중의 고통이 된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문제를 어떻게 웅변할 것인가?
고통의 문제를 일컬어 신정론이라 하는데 이것은 비교적 최근인 200~300년 전에 서구 문명에서 제기되었다. 신정론의 구성을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이 존재한다.
2. 신은 전능하다.
3. 신은 사랑이 많고 선(善)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이 피할 수 없는 모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 고통이 실은 무고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의 반론을 피할 수 없다.
“아하,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무고한 고통이란 없다고? 그렇다면 부모에게 살해당한 아기들은 자기 죄값을 받은 것인가?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저 어린이들 역시 무언가 죄를 저질른 게 틀림없군? 얌전히 횡단보도를 건너다 뺑소니 때문에 비명도 못 지르고 죽은 임산부는? 뱃속의 태아는? 그들은 무고한 고통을 당한 게 아니군?”
저자에 의하면, 신정론은 단순히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위기라는 데 의미가 있다. 기독교의 토양에서 자라난 현대인들은 반드시 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 위기는 수많은 질문을 낳는다.
`악은 어디서 왔는가? 신이 만들었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신은 선한가?`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른다.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토록 악을 방치하는 신을 예배할 수 있는가?’
저명한 기독교 설교학자 토마스 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매를 걷고 일어선다.
책은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다.
1장은 시대적 배경을 설정한다. 예배를 드리는 와중에 재앙을 맞은 리스본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현대인은 모두 리스본의 후인이라 보면 된다. 세속화와 과학으로 인해 우상이 사라지는 현상을 다룬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가 제기된다. 고통의 문제는 기존의 세계관을 깨드린다.
2장은 위의 논리적 대립 구도가 설정된다. `사랑이 많은 전능자가 있는데 왜 무고한 고통이 있는가?` 이에 대응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워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을 희생하고 영지주의로 빠져든다.
저자는 슬며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밝히는데, 그에 의하면 이러한 논리적 대립 구도는 불공평하다. 저 명제 안의 신은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은 최종적인 원인에 불과하다. 그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다.
3장은 신정론을 목회적으로 다룰 때의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설명한다. 예컨대 고통은 돌봄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지적 깨달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4장은 신정론을 해결하려고 시도한 (그러나 정통에서 멀어진) 선구자들의 허실을 다룬다. 과정신학자와 존 힉의 미학적 신정론이 소개된다.
간주곡으로 본래의 세계관이 무너진 사람에 대한 성경 이야기(narrative)를 소개한다. 동방의 의로운 사람, 욥이 등장한다. 그는 리스본 사람의 표상이고 현대인을 대표한다. 고통받는 사람을 잘못 대하는 여러 예를 욥의 친구들을 들어 설명한다. 뒤이어 하나님의 응답이 나온다.
5장은 기독교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신은 철학적인 명제의 신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온 신이다. 예수를 통해 밝혀진 신에 기반하여 위의 4가지 명제를 수정해나간다. 저자의 글솜씨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부분이다.
저자의 주옥 같은 결론(5장) 외에 주목할 만한 부분을 꼽자면 무신론자의 도덕과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이다. 신을 도덕의 기준으로 상정하기를 거절한 사람의 도덕관념은 외면이나 내면으로 향한다. 외면으로 향하는 사람은 운명의 힘을 과대평가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신, 즉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필연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사람은 대개 무신론자인데, 이들은 일상과 순간의 가치를 음미하는 엘리트주의에 빠진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재난에 맞닥뜨린 피해자와 그 가족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뜻밖의 병에 걸려 그 순간에도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순간을 즐기라는 조언은 헛되다.
과정신학은 신의 주권을 포기한 신학이다. 이 신학에서의 신은 토기장이라기보다는 온화한 설득자이며, 악에 맞서 싸우는 투사이기보다는 악의 위험을 직접 감수하고 공유하는 신이다. 과정신학의 신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지 않고 원래 있는 세상을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리모델링한다. 이 세상의 악은 더 높은(혹은 더 큰) 선을 만들기 위한 위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설명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신이 예배받을 만하지 않고 위로를 주지 않는다고지적한다. 과정신학의 신은 고통받는 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설득할 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바라는 신의 초상이 그러할까?
무엇보다 큰 문제가 있다. 이런 신학 안에서의 고통과 악은 선을 위한 대가로 환원되어 버린다. 부모의 손에 죽은 갓난아기는 대체 어떤 선을 위해 대가로 지불되었는가?
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악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욱 끔찍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의 말은 섣불리 고통을 풀어헤치려는 우리의 시도에 경종을 울린다.
우리는 신을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고 인지 밖에 있을 신과 정의, 그리고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신자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