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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의 위로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평점 :
가끔은 곁을 내어주는 것 만으로도.
다람쥐의 위로
존 텔레헨
배가 아픈 날이었다. 서둘러 나가는 길, 유독 잘 삐끗하던 발목을 또 접질렀다. 우득,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시간은 그렇다고 멈추지 않으니까. 그걸로 끝나길 바랐는데 지하철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 개찰구에서 정신없이 나와 약속 장소로 가기도 전에 모든 것이 너무 버겁기만 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엉엉 울며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런 날이 있는 걸까.
우리 모두가 한번 쯤은 느껴봤을 그런 날, 마음 속 모든 세포 하나 하나마저도 내 맘대로 되어주지 않던 그 날. #다람쥐의위로 는 보드라운 털뭉치의 귀여운 일상을 통해 그 순간 우리가 간절하게 필요했을 오밀조밀한 위로를 건넨다.
어느 날 아침 개미가 숲을 걷고 있었다.
머리가 너무 무거워.
…
내가 이렇게 지독스럽게 생각을 많이 하는데, 당연한거지.
작은 숲 속 마을, 너도밤나무 꿀을 좋아하는 다람쥐와, 큰 상처를 입은 뒤 행복을 잃어버린 것 같은 딱정벌레. 자꾸만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코끼리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개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람쥐는 때로는 그저 문을 열어주기도, 작은 나뭇잎 조각에 편지를 써 보내기도, 가끔은 작은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푹신한 이야기들을 읽어내리다 보면 이건 그냥 이솝우화 같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행복을 찾기 어려워 작은 빛 한줄기도 보기 힘든 딱정벌레와 괜한 허세를 부리며 으스대던 개구리.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갸우뚱거리는 작은 다람쥐까지도, 모든 것은 결국 나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나만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난 거북이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아.
작은 책을 휙휙 넘기며 읽어내리다가, 마음을 똑똑 두드리는 이야기들을 마주했다. 고슴도치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안부를 묻는 코끼리, 그저 사자로 존재할 뿐인데 스스로의 울음소리가 미안해 삐약거리기로 한 사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책의 앞부분으로 다시 돌아갔다. 삶의 어느 순간엔 내 마음속의 사자가 문을 비집는 때가 있다. 그리고 거북이처럼 나 자신의 존재 정의가 궁금한 밤도 있다. 이 모든 순간, 결국 우리가 필요한 건 가만히 들어주는 다람쥐, 또 나 자신일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이 지겨워질 때가 있어. 넌 그럴 때 없니?
개미가 물었다.
도대체 왜 지겨워진다는 거야?
다람쥐도 물었다.
그건 모르지. 그냥 말 그대로 지겨워지는 거야. 전반적으로 말이야.
개미가 답했다.
그래, 이제 나도 나 자신이 지겨워졌어.
개미와 다람쥐는 아무 말 없이 휴식을 취했다.
몽실 몽실 작은 솜털뭉치가 바쁘게 숲속을 쏘다니며 만나는 동물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듯 하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통찰을 우화로 풀어내는 저자는 <다람쥐의 위로>에서도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서술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준다. <다람쥐의 위로>에는 대단히 따스한 위로가 없어 더욱 다정하다. 감정도 사건도 그저 일어나고 끝나기 마련.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교훈을 자꾸만 얻어가고, 또 잊어먹는 것 뿐이다.
나는 불행해.
어느 날 아침 무심코 거북이는 생각했다.
순간 놀라서 머리를 등딱지 밑으로 쏙 집어넣었다.
아니 왜 그런 생각까지 하는 거야?
내가 불행하다고? 나는 전혀 불행하지 않아. 난 틀림없이 아주 행복해.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해도 뭔가 양심에 찔리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그저 마음에 피어오르는 감정들을 가만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하철 역 앞에서 엉엉 울던 때의 나는 작은 딱정벌레였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고 결국 손해를 보고는 입이 비쭉 나온 거미도 나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때로는 다람쥐 덕분에 잘 마무리되기도 하고 대부분은 바람이 실어다 주는 작은 편지같은 시간으로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 이 동물 저 곤충이 되기 바쁜 하루를 보냈을 누군가. 달콤한 너도밤나무 꿀과 함께하는 작은 휴식이 필요하다면, 이 귀여운 털뭉치가 보여주는 숲 속의 이야기에 밤을 내어주길. 결국 이 모든 건, 내 안의 이야기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