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서광 지음 / 불광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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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은 마음의 본질과 작용, 깨달은 마음과 깨닫지 못한 마음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통해서 깨달음과 무지에 대해서 정의하고, 마음이 오염되는 과정과 정화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수행방법까지 제시함으로써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하여 전하고 있다.(4쪽) 저자는 원효스님의 소와 감산대사의 풀이를 참고해서 전통적인 분류체계를 따르지 않고 이해를 중심으로 전달하기 쉽게 해설하고 있다.(5쪽)

대승의 본질은 중생의 마음이며, 중생의 마음은 본래부터 깨달음의 상태에 있는 마음(眞如心)과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生滅心)의 두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22쪽) 근본불교가 중생을 부처와 구별하여 이원적으로 보는데 대하여, 대승불교는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23쪽) 따라서 근본불교에서는 중생의 최고경지가 부처보다 아래인 아라한의 경지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이 곧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본 모습인 부처를 보고 자기가 원래 부처였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의 길을 나선 중생을 보살이라고 부른다.(23쪽) 부처와 중생은 본질적인 깨달음의 수준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무지가 있고 없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24쪽) 인식 대상을 통한 표상과 인식 주체의 심상이 모두 허상임을 알고 실상인 진여를 향한 마음의 때를 벗기는 것이 수행의 시작일 것이다. 깨달음은 바로 존재의 실상과 허상을 바로 보는 것이리라.

진여(眞如)란 심상과 표상의 허상을 제거하고 나면 텅 비어있기도 하지만(如實空), 그 비어진 공간을 번뇌가 없는 공덕으로 가득 채우게 되므로 또한 비어있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如實不空)(39쪽) 먼저 심상과 표상의 허상을 제거해야 그 자리에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무수한 선행을 행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眞空妙有)(40쪽) 비어있지 않다는 것은 참되고 변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은 깨끗함과 맑음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이다.(43쪽)

수행이전의 본래부터 깨달아 있는 마음(本覺)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험적 깨달음(始覺)과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깨달음이다.(51쪽) 본래부터 모든 중생은 부처의 종자를 가지고 있음에도 무지로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므로 수행을 통해서 무지를 제거하고 나면 본래 깨달은 마음을 봄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53쪽) 완전한 깨달음은 일체의 관념을 제거함으로써 무지로 가려진 본각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작용하는 것이라고 한다.(62쪽)

파도가 없어지려면 바람이 멈추어야 하듯이 분노나 탐욕심이 없어지려면 무지의 작용이 멈추어야 하고, 사랑도 무지의 사랑이 아니라 지혜의 사랑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어야 한다.(68쪽) 어리석은 사람의 성장과 깨달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비만 필요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냉정함과 무시, 두려움도 아울러 필요하다고 한다.(74쪽) ‘인연따라 한다’는 말은 무관심하거나 내버려 두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마음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74쪽)

환경과 조건의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이해하는 깨닫지 못한 무지를 넘어 마음 수행은 세세생생 쌓아온 감각, 정서, 생각, 관념, 심상, 표상 등 기억의 종자, 덩어리, 숙변을 제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99쪽) 무지를 극복하고 깨달음을 위해서는 모두가 하나이고 한마음이라는 사실을 먼저 믿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108쪽) 더불어 수행을 위해서는 진여에 대한 믿음,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믿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 수행자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한다.(203쪽)

깨달음의 문제는 지혜를 얼마나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무지를 얼마나 제거했느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한다.(141쪽) 무지의 정도, 즉 내면의 정신수준과 근기에 따라 외부로부터 오는 인연도 달라진다고 한다.(145쪽) 진여의 작용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작용한다.(172쪽) 열반은 선물(177쪽)이고, 주객의 분별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가르침 자체에 매달려서 논쟁하거나 편견을 가져서도 안된다.(181쪽)

수행을 위해서는 움직이는 마음을 멈추는 수행(止, 禪)과, 움직이는 마음의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수행(觀, 위빠사나)을 함께 병행해서 해야 한다고 한다.(225쪽) 그러나 마음의 과정을 살피지 않고 어떻게 마음을 멈출 수 있을 것이며, 마음을 멈추지 않고 어떻게 마음의 과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위 두 가지의 수행방법이란 이름만 둘인 것이지 결국 하나를 이르는 것이리라.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로 흐르는 인연을 따라 당도한 그 바다는 역시 업식(業識)의 바다이다. 그 깊은 심연의 아뢰야식과 표면에 가까운 마나식, 그리고 바람부는 대로 요동치는 요별경식 등으로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바다를 쉽게 비울 수는 없겠지만, 바다를 조용히 다스릴 수는 있으리라. 다스린 후에는 하늘로 올라 시절인연으로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눈과 비 등에는 좀 덜 오염되고, 정화된 업식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이리라. 그 윤회의 업을 단번에 끊어내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과 강물과 바다, 그리고 바람이 모두 다름아닌 바로 나(我)라는 깨달음이 전제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존재를 따라 흐르는 인식으로의 긴 여정에서 나는 지금 어떤 파도를 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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