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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약속드린 날짜에서 일주일을 더 연장했지만 또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머리 속에서는 빙빙 도는 내용이 글을 쓰려고 하면 정리가 안 되니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네요. 변명밖에 안 되겠지만 한 달 내지 두달 가량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오늘은 지난번에 한번 연기한 여섯번째 제언을 올리려 했지만 다시 한번 제 역량이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부족하지만 최대한 정리를 해서 올려야 하나,

한달 가량 여유를 가지고 차분히 가다듬어야 하나 고민을 하다 지금까지 올린 다섯 가지 제언을 쭉 봤습니다.

 

처음엔 나름의 열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한 연재였던 만큼 자신에 차 있었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아직 제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절감했습니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일이니만큼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제 나름의 결론에 이르게 되어 연재 중지 공지를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 이외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염치 없지만 여유를 가지고 다시 한번 차분히 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좋은 글로 보답하는게 제 글을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분들께 제가 해야 할 도리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지 않게 하겠고 보다 완성도 있는 글을 올릴 수 있을 때 까지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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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먼저,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 드립니다.

 

 

2주 전인 7월 5일에 여섯 번째 제언을 7월 19일에 올린다고 했는데

역량 부족으로 두번째 제언 이후 한번 더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글을 올리려는 욕심에 내용 정리가 안 되고 뒤죽박죽 되어버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섯번째 제언은 7월 26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셨을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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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섯번째 제언 올립니다.

 

오후 3시에 올린다고 했는데 조금 늦었네요.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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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혁명

부제: 교육혁명에 대한 대통령의 제언

 

다섯 번째 제언-교과 과정은 지나치게 어려울 필요가 없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 제가 지난 네 번째 제언 때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기 위해 시험에 잘 나오는 내용을 기계처럼 달달 외우고 문제 유형 익혀가며 시험을 준비한 다음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에서 새하얗게 지워버리는 공부는 가짜 공부이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학력 저하, 국가경쟁력 저하를 들먹이며 주입식과 무한경쟁의 방식으로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전쟁에서 살아남게 하는 것만이 교육이 추구하는 단 하나의 목표인 현행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입시에 매몰된 채 입시에만 몰두하는 현재 교육 방식과 체계가 교육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비정상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초중등 교과과정을 중점적으로 보도록 하고, 한번 미뤄뒀던 주제인 민주시민 육성이 우리 교육의 근본 목표와 철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은 당분간 미뤄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 내용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지나치게 어려운 교과과정이 불러오는 부작용과 폐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과목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분들이 공감할거라 생각하는데 저는 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이라고 얘기하자마자 벌써부터 학교 다닐 때 수학 시간에 시달리던 지긋지긋하고 머리 아팠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수학에 대해 떠올리는 생각이 지긋지긋하고 머리 아픈 것이라 여기고 일축하는 것은 초중고 12년의 경험과 안 좋은 기억을 통해 형성된 고정관념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대학입시가 끝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수학을 평생 거들떠보지도 않는 현상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결국 지나치게 높은 교과과정이 불러오는 가장 큰 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수학 과목에만 그치겠습니까? 수학 아닌 다른 과목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도대체 대한민국의 교과 과정은 무엇 때문에, 무슨 연유로 지나치게 어려운 것인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무한경쟁을 외치며 교육에도 오직 경쟁논리만이 필요하다고 주구장창 외쳐대는 자나 집단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만 학력수준과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일까요?

 

우리 아이들이 초중고12년 동안 배워야 하는 교과 과정 수준은 지나치게 높습니다. 게다가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기까지 합니다. ‘배우는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수준까지 높으니 학력 수준도 높아지고 결과론적으로 국가 경쟁력도 높아지는 거 아냐?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배워야할 양이 많고 수준이 높다는 것만으로 학력 수준이 높아지고 국가경쟁력이 향상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한번 차분하게 생각해봅시다. 고등학교 수학 과정에 미적분이 있다고 그것이 곧 우리 학생들의 수학 수준을 보장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미적분 개념을 거의 이해할 수 있는 학생 비율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현실인데 단순히 배우는 양이 많고 수준이 높다는 자체가 학력과 국가경쟁력 향상을 보장해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미적분은 개념 자체가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적분을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미적분 개념 자체가 어려운 것에 있지 않습니다. 미적분을 접하기 전에, 즉 미적분을 이해하기 위해 미리 이해하고 있어야 할 개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걸 누가 모르나? 다 미적분 배우기 전에 배우는 것들 아냐?’ 라고 얘기하고 싶으시죠? 미적분 이해하려면 수열극한 이해해야 하고 수열극한 이해하려면 또. 개념이 서로 맞물려 있고 앞의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뒤의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수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겠습니까? 개개인의 학습능력과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몇 학년 몇 학기에는 이 부분까지 진도가 나가야 함이라는 식으로 교과 과정을 편성하기 때문인데 그럼 그건 또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학교 내신 시험이건, 대학 입시 시험이건 객관식 문제로 점수를 매겨 학생들을 한 줄로 줄 세워야하기 때문인데 그러려면 기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기준이 바로 초중고학년학기 마다 촘촘히 편성한 교과과정입니다. ‘학생 개개인이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가?, 잘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촘촘히 짠 교과 과정별로 출제 범위를 정해 단 하나만의 정답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로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매겨 줄 세우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렇듯 등수를 매겨 학생을 줄 세우는 것만이 교육이 추구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표인 현실에서 개개인의 학습이해도, 능력, 전체적인 수준이 과연 중요하겠습니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문제풀이 기계를 걸러내는 것만이 우리 교육이 추구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표라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조금 전에 들었던 의문 도대체 대한민국의 교과 과정은 무엇 때문에, 무슨 연유로 지나치게 어려운 것인가?’로 돌아가 본다면 교과 과정이 비정상적이리만치 지나치게 어렵게 촘촘하게 짠 것이 문제라면 교과 과정 수준을 좀 더 평이한 수준으로 낮추면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나?’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교과 과정은 결코 평이한 수준으로 낮출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대학 입시 시험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대학에 가서 고등교육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과 학습 능력을 갖췄는가를 평가하는 것이 목표입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제가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학교, 학과 내지 학부별로 일등부터 꼴등까지 각 대학마다 입학생을 손쉽게 걸러낼 수 있도록 전체 수험생의 등수를 매기는 것이 우리 대학 입시 시험이 추구하는 목표이지 않습니까? 학교 순위, 학과 순위가 뚜렷하게 줄 세워진 대학 서열 구조에서 60만 명이 넘는 전체 수험생 중 0.4%, 1.6%, 9.9%를 걸러내려면 대학 입시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겠습니까? , 바로 그 빌어먹을 변별력입니다. 천 명 단위, 만 명 단위도 아니고 60만 명이 넘는 수험생 중에서 0.4%, 1.6%, 9.9%를 걸러내기 위한 변별력을 대학 입시 시험이 갖춰야만 대학 서열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데 교과 과정이 지금보다 평이하다면 과연 대학 입시 시험이 과연 변별력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

 

학벌에 따른 부당한 차별을 개개인이 평생 감수해야 하는 기형적이고 비정상적인 학벌체제를 뒷받침 해주는 대학 서열 구조를 유지하려면 대입 시험은 변별력을 갖춰야 하고 그놈의 변별력 때문에 초중등 교과 과정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지나친 학업 부담을 무겁게 지우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학력 저하를 막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려면 현행 수준의 교과 과정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교과 과정이 지금보다 평이해지면 학력 저하로 이어지고 국가경쟁력이 곤두박질 칠 것이 뻔하다? 이거 다 헛소리고 심한 말로 표현하면 선동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학생이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 어쨌든 많은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는 이른바 수포자가 되는 현실에서 고등학교 수학 과정에 미적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자체가 학력 수준을 높이고 국가경쟁력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육이 수학을 교과과정에 넣어 아이들에게 수학을 교육하는 이유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수학에 있어 기본 중의 기본, 가장 기초는 수 개념입니다. ‘인류가 숫자를 체계화해 숫자를 쓰기 이전과 쓰기 시작한 이후의 차이는 어떤 것이 있는지, 숫자를 어떻게 표시해왔는지, ‘0’의 발견이 수 개념 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수 개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분수’, ‘소수개념은 무엇인지‘, 이와 같은 수 개념을 천천히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수 개념이 확장된 실수, 방정식, 인수분해, 함수, 도형 등 다양한 영역을 학습할 수 있는 토대를 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조카가 초등학교 다니던 때 수학 교과서를 봤던 저는 깊은 충격을 받았을 만큼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수학 교과서에 분수가 있는 걸 본 것입니다. 분명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4학년 때 분수를 배웠던 것 같은데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3학년 1학기 교과서에 분수가 있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아니, 무슨 20여년 새에 초등학생들이 수 개념 이해도가 2년이나 앞당겨질 만큼 어린 아이들이 하나같이 갑자기 똑똑해진 것도 아닐 텐데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이 분수를 배워야 하다니? 이거야말로 국가가 나서서 선행학습, 사교육 하라고 조장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아홉 살 밖에 안 된 초등학교 2학년 아이에게 분수를 이해하라는 짓 자체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요즘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부모님들이 아이들 공부 봐주거나 도와주겠다는 요량으로 교과서 봤다가 하나같이 깜짝 놀란다는 거 아닙니까? 자신들이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생각하고 아이들 교과서 봤더니 교과 과정이 너무 어려워졌다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 아동에게 육체적으로 폭력과 위해를 가하는 작태를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아동학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동에게 육체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만이 아동학대 라고 생각하십니까?

 

보통의 평범한 아이들이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내용을 억지로 이해하고 외울 것을 강요하는 것은 학대 아닙니까? 육체적인 가해만 학대가 아니고 정신적 가해도 엄연한 학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린 아이들인 초등학생에게까지 과도한 학습 부담을 지워 마음껏 뛰어놀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잠도 충분히 잘 수 없게 함으로써 육체적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요? 내 아이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좋은 대학 갈 수 있게 하겠다는 오로지 그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이 어이없고 기막힌 현실에 만족해서 아이들을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전쟁에 내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등학생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전쟁에 내 아이를 내몰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인 너무나도 견고한 학벌체제가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을 거스르기에는 개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과 범위를 벗어났다고 생각하기에 섣불리 거부하고 빠져나갈 수도 없으니 고육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내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비참한 현실이 없어지려면 견고한 학벌체제가 깨져야만 합니다. 견고한 학벌체제가 깨지면 너도 나도 서로 좋은 대학 가겠다고 머리 터지게 싸울 필요는 자연스레 없어질 테니 우리 아이들이 과도한 학습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교육은 비로소 민주시민 육성이라는 목표에 충실하게 될 것입니다. 견고한 학벌체제가 깨짐으로서 우리 아이들이 과도한 학습 부담에서 벗어난다고 학력 수준이 떨어지고 국가경쟁력에 빨간 불이 켜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다음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이 2007년에 발표한 국가경쟁력 세계 5,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주도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순위는 언제나 중하위권인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알파벳을 배우고 몇 가지 단어를 익히는데 1, 1부터 20까지 덧셈, 뺄셈을 수없이 반복하는데 또 1. 손가락을 사용하든 발가락을 사용하든 구구단 같은 계산법을 미리 가르쳐주지 않고 어른들은 지켜볼 뿐인데 그 이유는 더디더라도 아이들 스스로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선행학습입니다. 선행학습은 다른 아이들이 물을 기회를 빼앗는 것이며 또한 교사의 수업권을 침해하는 엄청난 짓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교실의 아이들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에서 처음 맞는 꼭 넘어야 하는 자격시험이 있는데 그것은 자전거 면허증과 수영 인명구조 자격증입니다. 이는 지식만큼 중요한 것은 안전과 여가이며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한 때는 주입식 국민교육 제도와 선진학습법 수출국 이었던 독일입니다. 그 교육이 키운 괴물이 전쟁과 우월주의였기에 역사의 반성에서 다시 출발하고자 했던 교육이 얻은 해답이 ‘1등 다툼은 필요 없다.’, ‘우리의 교실은 한두 명의 뛰어난 사고보다 모두의 깊이 있는 사고를 원한다.’입니다.@

 

이러한 독일이 한 때 수출했던 주입식 국민교육 제도와 선진학습법을 흔히 프러시아식 교육이라 부르는데 프러시아식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는 간결하고 명료합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생각하는 법을 말살하고 오로지 명령과 체제, 권위에 복종하고 순응할 수 있는 기계 부속품 같은 사람을 공장에서 대량으로 물건 찍어내듯 키워내는 것이 프러시아식 교육이 추구하고자 했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을 통해 길러진 사람들이 히틀러가 저질렀던 참혹한 인권유린과 전쟁 범죄의 공범 내지 방조자가 되었다는 뼈아픈 반성에서 뿌리 내린 교육철학이 조금 전에 소개했던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이 프러시아식 교육 어디와 많이 닮아있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개항하고 서구 근대 문명을 뒤쫓기 위해 새로 정비했던 사회제도와 법체계는 상당 부분 독일 것을 모방했고 그 중심에 프러시아식 교육이 있으며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강제로 이식한 교육방식과 체계가 그대로 남아 지금껏 대한민국의 교육체계와 방법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교육의 근본 철학이나 목표에 대해 단 한순간도 고민하거나 생각해보지 않았고 교육이 추구하는 단 하나의 목표가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토대로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주시민을 길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과과정이 지나치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는 대학 입시 시험이 변별력을 가져야하기 때문임을 봤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나치게 어려운 교과과정이 불러오는 부작용과 폐해가 무엇인지 봅시다.

 

초중고 12년 동안 아이들이 학습해야 할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수준도 지나치게 높은데다 교과 과정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여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학습측면에서 보자는 겁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점 어려워질 교과 과정을 이해하려면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제대로, 확실하게 완벽에 가깝게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텐데 방법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고 여러 면에서 개인차도 있을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학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초적인 개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려면 아이가 스스로 깨우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봐줘야 합니다. 즉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게 지켜봐야 한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교과 과정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수학을 예로 들면 초등수학은 6년간 학생 스스로가 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수학에 있어 기초 중 기초는 수 개념입니다. 이 수 개념을 사람 신체에 비유하자면 뼈와 장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뼈와 장기가 온전하고 튼튼한 상태에서 살을 덧붙여야 신체가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수 개념을 완벽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어야 살이라고 할 수 있는 실수, 방정식, 인수분해, 함수, 도형 을 포함한 나머지 개념들을 하나씩 덧붙이며 수학 교육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수학적 사고 능력, 추론, 논리적 사고 등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비로소 길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유의할 것은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금 하듯 주입식으로 알려주는 개념을 무작정 외우고 문제 유형 익혀 문제 푸는 연습만 주구장창 하는 것은 몸집 불리는 데만 혈안이 돼서 뼈와 장기에 무리가 생기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겁니다. 당장 문제 척척 풀어내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는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계속 키우는 것이 교육이 추구해야 할 목표 중 학습 영역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 때문에 초중등 교과 과정은 지금처럼 지나치게 어려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발달된 정보통신 기술에 힘입어 접근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언제 어디서는 손쉽게 원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에서 지워버릴 내용을 시험 보기에만 급급해 달달 외울 수 있는 단편적인 사람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인지할 수 있고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을 선별할 수 있으며 자신이 찾은 내용을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교과 과정을 인위적이며 일방적으로 지나치게 높게 잡아놓고 학생 개개인의 수준과 능력은 싹 다 무시한 채 획일적으로 정해진 수준을 따라오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등교육의 목표는 교과목 별로 학습의 기초가 되는 내용을 학생 개개인이 스스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기초를 확실히 익힌다면 그 다음 과정은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기본 역량을 갖춘 것이기 때문에 중등 교과 과정은 지금처럼 목표치를 획일적으로 정해놓고 모든 학생이 따라올 것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면 되는 것입니다. 수학을 예로 들면 이번 학기에는 어느 부분까지 배우고 싶다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가령 저는 이번 학기에는 2차 함수 까지 배우고 싶습니다.’ 하는 식으로 말이죠. 대학에서 수강 신청하듯 교과목 별로 자신이 배우고 싶은 내용을 직접 고르는 것입니다.

 

물론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교과 과정도 있어야겠죠? 그 부분은 학습 영역 보다는 의무교육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는 성인이자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되, 내용을 달달 외워 시험 보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서로 돕고 살아갈 수 있는 한 사람의 민주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생각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히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민주시민 육성이 우리 교육의 철학과 근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주제로 말씀 드릴 때 보다 자세하게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오늘 제가 말씀 드리고 싶었던 내용이 제 머릿속에서는 명쾌한 것 같은데 막상 말씀 드리고 나니 뭔가 앞뒤 연결이 매끄럽지 않고 내용이 전체적으로 두서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 역량이 부족한 탓입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제언을 통해 여러분들께 꼭 전해드리고 싶었던 제 생각과 주장의 핵심만큼은 어설프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스스로 위안 삼고 싶습니다. 귀한 휴일에 짧지 않은 시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두 주 뒤인 719일 오후 3시에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대통령이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쇼.

 

------------------------------------------------------------------------.@@ 내용은 ebs 지식채널e ‘공부 못하는 나라편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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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여섯번째 제언은 7월 19일 오후 3시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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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네번째 제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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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혁명

부제: 교육혁명에 대한 대통령의 제언

 

네 번째 제언-진짜 공부란 무엇인가?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 오늘은 제가 지난 세 번의 제언을 통해 말씀 드린 내용 중 핵심을 짚어보며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우리 교육은 철학이 없다.

. 현재 교육 목표는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문제풀이 기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 입시전쟁의 승자는 극소수이며 그들만이 우리 사회의 요직과 이권을 사실상 독차지 하고 있다.

. 입시전쟁에서 기회균등은 형식적 균등에 불과하다.

다섯. 극소수의 승자만을 위한, 모두가 불행한 문제풀이 기계 만드는 교육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주시민 육성이 우리 교육의 목표와 철학이 되어야 한다. 이상입니다.

 

, 그런데 그동안 심심찮게 나오던 주장이 우리 교육 목표를 민주시민 육성에 둬야 한다는 세 번째 제언 이후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습니다. 가령 “‘하향 평준화된 학력 수준을 더 떨어뜨리자는 것이냐?”, “그런 식으로 하면 국가경쟁력이 떨어질 것이 훤한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제 공부할 아이들도 학교 가면 공부 안 하겠다. 아이들이 공부는 안 하고 학교에 놀러만 가게 하겠다는 것이냐?”, 대략 이런 형태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형태의 주장을 반박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하는데 우리는 보통 입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에만 초점이 맞춰진 교육법이나 학습법에만 익숙해 있다 보니 주입식에 기초한 무한경쟁 방식만이 경쟁력을 보장하고 엘리트를 길러낼 수 있다는 인식에 사로잡힌 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결코, 아니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교육은 국가경쟁력 향상과 엘리트 육성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만 존재 의미 내지 가치가 있다.”는 식의 주장에 힘입어 주입식에 기초한 무한경쟁을 통해 입시전쟁에서 승자를 걸러내는 방식이 아이들의 학습 능력을 오히려 망가뜨리고 있으며 개개인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도 경쟁력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한 어조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사회는 입시전쟁에만 초점이 맞춰진 방식과 현실에만 너무 익숙해 있다 보니 다른 방식의 교육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보지도 않을뿐더러 그러다 보니 교육 목표를 민주시민 육성으로 잡자는 제 주장이 뜬금없고 황당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오늘은 민주시민 육성이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제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하려 했는데 학력 저하’, ‘경쟁력 저하주장이 너무 많아 오늘 주제는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 로 잡았습니다.

 

진짜 공부라니? 그럼 가짜 공부라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공부란 어떤 것입니까?

너무 포괄적인 물음이라면 범위를 공부법으로 좁혀볼까요?

선뜻 떠오르지 않으면 학교 다닐 때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무래도 낫지 않겠는지요?

 

선생님이 앞에서 얘기하면서 칠판에 적는 내용 따라 적고 교과서에 밑줄 긋고 형광펜으로 칠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선생님이 강조하거나 시험에 자주 나온다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외우는데 어떨 때는 개념에 대한 충분한 이해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그야말로 무식하게 외워 문제 풀면서 문제 유형 익히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시험 준비하고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에서 싹 다 지워지곤 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가 공부 내지 공부법에 대해 떠올리는 방식은 좀 전에 얘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학교 다닐 때 하던 방식이니까요. 오늘 주제를 보다 쉽게 와 닿게 좀 전에 얘기한 공부법을 가짜 공부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오늘 주제가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 라고 했는데 가짜 공부를 가정했으니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결론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짜 공부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교육은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몇 번이고 주장했습니다. ‘문제풀이 기계에서 문제풀이를 뺀 기계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입니까? 제가 너무 추상적인 물음을 던졌나요?

 

학교 다니며 교육 받는 우리는 사람입니까?, 기계입니까? 당연히 사람이겠죠. 그런데 우리 교육은 사람을 데려다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임을 밝혔습니다. 사람을 흔히 만물의 영장’, ‘고등 동물이라 칭하는데 다른 생물체와 비교했을 때 사람만이 가진 특성이 뭐가 있겠습니까? 직립보행, 도구 이용, 언어 사용, 생각하는 능력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 중 언어 사용생각하는 능력두 가지를 꼽고 싶습니다.

 

사람은 말하고 듣는 언어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데 앞의 물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기계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계는 정교하고 정확합니다. 하지만 그 정교하고 정확한 기계도 어디까지나 기계를 설계하고 만든 범위 안에서만 쓸모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기계는 애초에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 이쯤 하면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 뿐인 현재 교육과 생각하는 능력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고 제가 무엇 때문에 진짜공부를 언급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십니까? 기계는 정교하고 정확하지만 설계하고 만든 범위 안에서만 쓸모 있다고 했죠? 그렇다면 문제풀이 기계는 어떨까요? 문제풀이 기계도 쓸모는 있습니다. 정형화된 단 하나만의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객관식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쓸모 있습니다. 단 하나만의 정답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에서 남들보다 정답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면 보다 높은 서열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는데 현재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에 이보다 더 쓸모 있는 기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기계는 어디까지나 입시전쟁에서만 쓸모 있을 뿐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기계는 아무리 정교하고 정확해도 애초에 설계하고 만든 범위 안에서만 쓸모 있을 뿐이라고요.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보통 떠올리거나 생각하는 공부 내지 공부법은 결국 문제풀이 기계가 되기 위한 것에 그치지 않겠습니까? 정교하고 정확하지만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쓸모 있는 기계, 그리고 그 기계가 애초에 가질 수 없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능력.

 

어떻습니까? 우리 교육이 만들어내는 문제풀이 기계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거나 있겠습니까? 저는 단언컨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개개인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단 하나만의 정답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에서 자신의 생각이 과연 중요하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뭐가 중요합니까? 객관식 문제가 요구하는 능력은 정형화된 정답을 빨리,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많이 찾아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객관식 문제로 점수를 매겨 수험생을 한 줄로 줄 세워 입시전쟁에서 승자를 가려내려는 목표 달성을 위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 교육이 아닌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교육, 바로 이것이 우리 교육의 자화상이고 현실이며 적나라한 민낯입니다.

 

학년이 올라가 입시시험이 가까워질수록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계속 죽이며 문제풀이 기계가 되기 위해 익숙해져야만 하는 공부법. 저는 그 공부법을 과감하게 가짜 공부라 정의하고 제가 무엇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진짜 공부라고 생각하는지 말씀 드리려 하는데, 단순히 공부법의 차이만으로 가짜 공부와 진짜 공부를 논하기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 그리 흥미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여럿 있겠지만 오늘은 임진왜란을 사례로 들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하나의 사안을 두고 가짜 공부와 진짜 공부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봅시다.

 

먼저 가짜 공부. 우리 대다수가 대동소이하게 겪었을 방법입니다.

 

선생님 혼자만 교과서와 부교재를 이용해 얘기합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대략적인 배경을 설명한 뒤 우선 연도부터 외우라고 하겠죠? 몇 년입니까? 1592년입니다. 임진왜란 발발연도 외우기 쉽게 한다고 조선 건국 1392년에서 정확히 200년 뒤라고 얘기하며 조선 건국 연도와 임진왜란 발발 연도를 같이 외울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는 선생님도 있으실 겁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대략적 배경 설명했고 발발 연도 짚었으면 뭐 남았습니까? 시간 순에 따른 주요 전투와 전투가 이뤄진 장소, 전투 이름, 지휘한 장수 이름 얘기할 것이고 우리가 임진왜란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사람 누구입니까? 그렇죠. 이순신 장군 얘기 나오기 시작하면서 주요 해전이 무엇인지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전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얘기하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 당사자인 우리를 일방적으로 배제한 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이뤄진 강화회담, 정유재란, 전쟁이 끝난 뒤 동아시아 정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을 전체적으로 어디까지나, 선생님 혼자설명할 것입니다.

 

그다음 선생님이 중요한 것을 하나하나 짚어주겠죠? “어느 부분 시험에 잘 나온다.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문제 나오고 지문 유형 대략 이렇게 나온다.” 와 같이 입시문제 대처 요령 짚어주고 하나 더 해주겠죠?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암기 요령이죠.

 

대략 이런 식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진도가 끝나면 학생들은 선생님이 알려준 요령을 참고해 외울 건 외우고 문제 풀면서 문제유형 익히고 시험을 봅니다. 그 다음에 뭐 남았습니까? 뭐긴 뭐겠습니까? 시험 끝났으니 머리에서 새하얗게 지워질 일만 남았죠. 그렇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현재 우리 교실에서 하고 있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 현실에서 이뤄져야 할 진짜 공부는 어떨지 생각해 봅시다. 우선 이 방법과 가짜 공부법의 가장 큰 차이는 선생님 혼자서만 얘기하는 주입식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의 역사적 사안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입시문제 풀이가 요구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부터 열까지 선생님 혼자 얘기하지 않고 임진왜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즉 세세하게 짚어주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다음 선생님과 학생이 전체 토의를 통해 발표주제를 정하고 조를 짠 다음 조별로 발표 주제를 고르면 조별로 발표 주제에 맞춰 조사하고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조별 발표 수업을 하고, 각 조마다 발표가 끝나면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자유 토론을 진행하는데 말 그대로 자유토론 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라는 큰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는 가급적 질의응답에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조의 발표가 끝나면 각 조는 발표수업 자료와 자유 토론 항목을 모아 최종 보고서를 만들어 발표하고 선생님께 제출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평가한 평가서와 다른 조를 평가한 평가서를 작성해 제출합니다. 다시 말해 최종보고서는 조원 전체가 작성해 제출하는 것이고, 학생 개개인은 자신을 스스로 평가한 평가서와 다른 조 발표 내용과 자유토론 내용을 토대로 다른 조를 평가한 평가서 두 가지를 작성해 제출하는 겁니다.

 

이 때 선생님의 개입은 가급적 최소화합니다. 선생님은 발표 수업 이전에 큰 그림을 그려주고 학생과 전체 토의를 통해 발표주제를 정하고 나서 조별로 발표 주제를 고른 다음부터 발표수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학생들 몫으로 남겨두고 발표 수업이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선에서만 개입하고 학생 개개인이 수업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발표 수업에 임할 수 있도록 뒷받침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 어떻습니까? 이런 식의 발표수업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진짜 공부법이 맞기는 한 것인지, 저런 식으로 수업이 이뤄지면 학력 저하가 생기고 국가 경쟁력 약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 하시는 분들 있으시죠? 그렇다면 우리가 역사를 정규 교과로 편성해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이유 혹은 역사를 가르침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역사에 흥미가 없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하면 머리 아픈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암기과목으로 치부하기 십상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내가 이걸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는지 생각할 여유나 겨를도 없이 오로지, 단순히 시험에 잘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라 외운 다음 시험 보고 나면 머리에서 새까맣게 지워버리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역사는 머리 아픈 골칫거리, 암기과목으로 자연스레 인식하는 틀이 학창시절 경험과 맞물려 생길게 훤한데 그런 사람들이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적 사실과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거나, 설사 반복하더라도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함 아닙니까? 한 개인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거나 최소화 하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끊임없는 자기 성찰입니다. 그런데 자기성찰을 아무 생각 없이 언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라는 식으로 외우듯이 하면 자기 성찰이 되겠습니까?

 

성찰이 뭡니까? 사전에서 성찰을 찾으면 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깊이 살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한 개인이 자기 성찰을 할 때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 가급적 그러지 말아야겠다.’ 라는 식으로 피상적으로 한다면 진정한 자기 성찰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정규 교과로 편성해 배우는 궁극적인 이유는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개인이 자기 성찰을 할 때조차 피상적으로 해봐야 진정한 자기성찰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역사적 성찰을 하고자 할 때 피상적으로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역사를 교육하는 이유가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기계처럼 달달 외워 객관식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게 하고자 함이라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 역사 교육을 그런 식으로 한다면 우리 사회는 역사를 보는 시선과 틀이 단순히 지나간 사실, 그러한 사실들을 기계처럼 달달 외워 오로지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기 위한 것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금을 들인 의무교육을 통해 자기 성찰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키워내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 중에서 시험에 잘 나오는 부분을 기계처럼 달달 외워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물론 지금은 중요하겠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 입시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아 보다 높은 서열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만이 교육의 유일한 목표인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연 있겠습니까?

 

수업의 객체로서 선생님 혼자 진행하는 주입식 수업을 따라가기만 하고 따라가기에도 벅찰 수도 있는 수동적 학생.

 

수업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과 격의 없이 상호간에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역사와 현실을 보는 안목을 넓히고 민주시민의 기본 소양을 차근차근 쌓아갈 수 있는 능동적 학생.

 

우리 사회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성찰하고 그것을 발판 삼아 역사와 현실을 보는 안목을 넓히는 토대를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것이 의무교육을 통해 역사를 가르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하다면, 자신의 생각을 죽여 가며 정해진 답만 기계처럼 달달 외우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을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주체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며 스스로 묻고 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을 해야 하겠습니까?

 

단 하나의 정답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에서 귀신같이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중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할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가짜 공부와 진짜 공부가 쉽게 와 닿도록 임진왜란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이는 비단 역사 과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작품, 그 중에서 시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똑같은 시 한 편을 읽었을 때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문학 작품이 객관식 문제 지문으로 출제되는 순간 개개인의 생각과 정서, 감정은 미리 정해진 표준 정답 앞에서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상상력을 키우고 여러 간접경험의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문학작품이 입시에 잘 나오는 주요 문학 작품으로 둔갑하는 순간 상상력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입니다.

 

역사, 문학, 사회, 정치, 경제를 포함하는 인문사회과학을 배우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문사회과학은 사람 자체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하는 분야입니다. 사람의 본성, 본질, 존재론적 의미, 인류가 지나온 발자취, 사회현상과 같은 복잡 미묘한 분야를 다루려면 철학적 사유와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인데 이런 인문사회과학에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인문사회과학에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인 것이지 미리 정해진 답을 찾는 능력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은 어떨까요? 인문사회과학이 사람 그 자체에 대해 탐구하는 분야라면 자연과학은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 자연환경, 과학적 현상을 탐구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위해 수학과 과학을 정규 교과로 편성해 교육하고 있습니다. 실체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문사회과학과 달리 자연과학은 실체가 눈에 보인다는 차이가 있으니 객관식 문제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식의 교육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자연과학의 본질 내지 시작과 끝은 호기심입니다. 자연환경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생긴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인류는 자연과학을 통해 호기심에 대한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요? 자연과학이 지금까지 찾아낸 답이 언젠가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밝혀낸 스스로의 답에 만족하지 않는 꾸준한 지적 호기심과 물음입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 참으로 궁금한 것이 많다 보니 계속해서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아이들이 언제부턴가 묻지를 않습니다. 묻지 않는다는 것은 궁금한 것이 없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위험한 신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풀이 기계에게 스스로의 생각은 중요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오로지 입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문제풀이 기계가 되기 위한 경쟁에 매몰된 아이들이 입시전쟁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이전까지는 없던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음은 대학 현실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죽이는 교육 방식에 길들여져 묻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대학생, 오로지 학점 관리 잘 하고 스펙 잘 쌓아서 취업할 목적 말고는 대학에 다니는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기막힌 현실에서 여러분은 희망이나 미래가 보이십니까? 저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어떠한 꿈도, 미래도, 희망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 하는 사람이 대학에 가서 진짜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공부는 시험에 잘 나오는 내용을 달달 외워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은 다음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에서 새하얗게 지워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단언컨대 가짜 공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 함은 그것을 토대로 세상을 보는 시야를 보다 넓힐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진짜 공부란 바로 그 지점에서 단순히 새로운 것을 아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 것이며 그 능력은 다름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여러분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끝으로 또 강조합니다. 기계는 정교하고 정확하지만 설계하고 만든 범위를 벗어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문제풀이 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식 문제에서 미리 정해진 정답을 귀신 같이 잘 찾아내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못 하는 문제풀이 기계 밖에 안 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교육 방식을 지금까지 그래왔듯 계속 고수하고 지속할 것인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교육으로 바꿔낼 것인가.

 

이제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두 주 뒤인 75일 오후 3시에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대통령이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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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 뒤 오후 3시에 다음 제언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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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번째 제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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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혁명

부제: 교육혁명에 대한 대통령의 제언

 

세 번째 제언-제가 생각하는 교육 목표는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부탁드린 것은 들어주셨는지요? 무슨 부탁이냐고요?

 

저번 방송 말미에 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길러낼 것인가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가 답해보는 기회를 가져보셨으면 한다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한 답을 다시 떠올리며 방송을 보신다면 오늘은 훨씬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길러내는데 교육의 목표를 둘 것인가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따 말씀 드리기로 하고 세 번째 제언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현재 우리 교육의 목표는 서울대가 최고 정점에 있는 소위 명문대에 보내는 것 뿐 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에 부합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단 하나의 정답만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에서 정답을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많이 찾아내 보다 높은 서열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는 문제풀이 기계에 최적화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한 마디로 쉽게 말해 우리 교육은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견고한 학벌체제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서열화 된 대학 순위이고 합격 여부를 가려내려면 정답시비가 있어서는 안 되는 단 하나의 정답만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로 입시를 치러야 하고 대학 입시 응시생을 모두 점수로 매겨 한 줄로 줄 세워야하기 때문 아닙니까?

 

정신적으로 성숙기에 있는 10대 시절에 꿈, 열정, 앞으로의 포부, 정신적 성숙도, 관심사, 고민거리, 공부에 대한 흥미도, 자신의 존재론에 대한 고민을 포함해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거리나 생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죠. 중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하나같이 입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짓거리로 여겨지기만 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아이들 중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아이 한명 한명을 바라보는 시선과 잣대는 오로지 반에서 몇 등, 전교에서 몇 등, 전국에서 몇 등이라고 서열을 매긴 학업 성적 뿐입니다.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경쟁에서 서울대를 선두로 하는 소위 명문대에 갈 수 있는 인원은 극소수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입시전쟁에 내몰릴 것을 강요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은 낙오자라는 멍에를 스스로 짊어진 채 상처 받은 자존감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입시전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따뜻한 위로 한 마디라도 건네고 있습니까?

 

아니죠, 아닙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의 항변이나 외침을 향해 서울대에 갈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주어졌다. 따라서 서울대에 가지 못한 것은 모두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탓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손가락질 하고 비아냥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지배하는 기회균등 신화와 경쟁 만능주의에 근거한 논리입니다. 아뇨, 논리도 아니고 비열하고 저급한 수준 밖에 안 되는 주장입니다.

 

일단, 이것부터 짚어봅시다.

 

아이들에게 네가 공부에 흥미가 있어서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입시 준비해보렴’, 이런 식으로 말하며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줬습니까?

 

애초에 아이들에게는 선택권 자체가 없습니다. 본인이 공부에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 공부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면서 형식적으로나마 선택권을 주는 척조차 하지 않으면서 입시전쟁에 내몰아 놓은 채 기회균등을 논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을 낙오자로 낙인찍는 자체가 우스운 일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이 원치 않는 경쟁에 본인 의사와 아무 상관없이 강제로 내몰렸고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다시 도전할 기회조차 없다면 여러분은 납득하실 수 있습니까?

 

입시전쟁에 뛰어들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란 권리 자체를 박탈해 놓고 소위 명문대라 여겨지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언제든 도전할 기회조차 없는 현실을 우리 아이들이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애초에 선택권 자체를 주지 않았으니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무조건 납득하고 수긍해야만 합니까?

 

자 그런데요, 제가 입시전쟁의 승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는데 극소수, 극소수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 감은 잘 안 오시죠? 그래서 작년 입시 응시생 통계를 준비했습니다.

 

작년 입시 시험 응시생은 모두 668,991명입니다.

먼저 학벌체제의 최고정점에 있는 서울대 입학 정원은 3304명으로 전체 응시자 중 0.4%이며 평균 고교석차 1.4등입니다.

그 다음 소위 스카이라고 하죠? 서울대, 고대, 연대 입학 정원은 11,271명으로 전체 응시자 중1.6%로 평균 고교석차는 5등입니다.

서성한 입학 정원은 20,264명으로 전체 응시자 중 3%, 평균 고교석차는 9.1, 이중경외시 입학 정원은 32,850명으로 전체 응시자 중 4.9% 평균 고교석차는 14.7등입니다.

 

소위 ‘IN 서울이라 불리는 서울 시내 소재 대학 입학 정원은 66,645명으로 전체 응시자 중 9.9%며 평균 고교석차는 29.9등입니다.

 

, 그럼 전체 응시자 668,991명에서 서울 소재 대학 입학에 성공한 66,645명을 빼면 무려 602,346명입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극소수의 승자라고 여러 번 강조했을 때 보다 실감 나지 않습니까?

서울대 입학 정원은 0.5%도 안 되고 서울대-고대-연대 입학 정원은 2%도 안 됩니다. 서울 소재 대학 입학 정원은 10%가 안 되는 9.9%고요. 서울소재 대학에 갈 수 있는 인원이 천명 가운데 아흔아홉 명인데 서울 소재 대학에 가지 못한 남은 아이들이 경쟁에서 밀려난 이유가 개인 노력이 부족한 것, 오로지 그것 하나에서만 기인하겠습니까?

 

입시전쟁에 강제로 내몰린 아이들이 모두 다 한눈팔지 않고 12년간 머리 터지도록 싸우며 입시준비에만 매진한다 해도 소위 명문대 입학 정원은 정해져 있는 이상 그 범주에 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이를 극구 부정하고 내 아이는 할 수 있어라며 자기 최면 걸어봐야, 아니 안 좋게 표현해 정신승리 하고 있다고 현실이 바뀝니까?

 

천명의 사람을 초--12년간 교육하는데 4명의 서울대 입학생, 16명의 서연고 입학생, 99명의 서울소재 대학 입학생,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 마치 공장에서 규격화된 물건 찍어내듯 문제풀이 기계만 만들어내는 지금의 교육 현실을 지속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세금을 들여 초--12년간 의무교육을 하고 그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야말로 극소수, 천명 가운데 4, 16, 99명만을 위한 문제풀이 기계만 만들어내는 교육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은 근대화된 문명사회 입니까?

헌법 11항에 민주공화국임을 만방에 천명한 대한민국은 헌법 조항에서만 민주공화국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나 대한민국은 현실에서도 민주공화국임을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여러분이 지금 당장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거나 있으려면 사회의 모든 요직과 이권을 사실상 독차지하고 있는 몇몇 소수대학 입학정원을 걸러내기 위한 문제풀이 기계를 찍어내고 있는 교육현실이 바뀌어야 한다고 저는 분명한 어조로 주장하고자 합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가슴 뛰게 하는 이 멋진 구절이 무엇인지 혹시 아십니까?

제가 헌법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조문인 대한민국 헌법 10조입니다.

 

모든 인류는 지역, 성별, 나이, 계층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가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의 범주를 대한민국에 국한해 생각해 봅시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성별, 나이, 지역,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정형편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없이 누구나 동등하고 평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허나 교육의 목표가 오로지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을 극소수의 승자가 되기 위한 것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면 동등하고 평등한 교육은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경쟁에서 출발선이 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쟁이 이뤄지는 동안 주변 여건이나 받을 수 있는 지원이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인데 그러한 요인으로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부모의 학벌, 집안 재력의 차이, 사는 지역이 핵심 요인으로 꼽을 수 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이뤄지는 경쟁이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런데도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는 기회, 즉 입시전쟁에는 누구나 뛰어들 수 있으니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기회균등이요? 말이 좋아 기회균등이지 기회만 균등하게 주어지면 뭐 합니까? 형식적으로야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졌지만 실질적으로도 기회가 균등하려면 좀 전에 언급한 부모의 학벌, 집안 재력 차이, 사는 지역과 같은 개인의 노력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요인이 경쟁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없거나 있더라도 미미한 수준에 그쳐야 합니다.

 

허나 입시전쟁에서 이뤄지는 경쟁은 공정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공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승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요직과 이권을 사실상 독차지하고 있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미래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학부모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식이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하려고 돈을 쏟아부어봐야 결국 돈이 많을수록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겠지요?

 

0.4%, 1.6%, 9.9%라는 수치가 보여주듯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전쟁의 승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우리 교육의 실질적인 목표는 0.4%, 1.6%, 9.9%에 들어갈 수 있는 문제풀이 기계 만드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결국 우리 교육이 지금처럼 황폐화되고 갈팡질팡 하며 여기저기에 휘둘리는 이유는 우리 교육에 확고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초중고 12년간 의무교육을 통해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근본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으로 길러낼 것인가에 대해 물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실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 해 번 돈에서 정직하게 낸 세금으로 초중고 12년간 의무교육을 하고 학부모가 엄청난 사교육비를 쏟아 붓는 이유가 오로지 서울대를 선두로 하는 명문대 보내는 것뿐이라면, 정말이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리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해마다 60만 명 넘는 아이들이 0.4%, 1.6%, 9.9%를 위해 12년간 들러리만 서다가 헌법이 보장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모조리 빼앗겨야 합니까?

 

무슨 말만 하면 국가경쟁력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자들의 주장처럼 엘리트를 선별하기 위해서라면 해마다 60만 명의 아이들에게서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빼앗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것입니까? 엘리트를 선별하고자 하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60만 명에게서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과 권리를 빼앗는 작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정당성을 가지는 것입니까?

 

저는 입시전쟁을 통해 걸러진 0.4%, 1.6%, 9.9%, 오로지 그 사람들만이 엘리트나 천재라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백번 양보해 그 주장이 설사 맞다 쳐주더라도 그들을 위해 60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권리와 기본권을 빼앗기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의 영역입니다.

 

60만 명이요?

말이 좋아 60만 명이지, 우리는 지금 해마다 우리 60만 대군보다 많은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 사회로 내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0.4%, 1.6%, 9.9%의 극소수를 위해 해마다 60만 명의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전쟁에 내몰린 채 학생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모두 빼앗기고 12년간 들러리나 서는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지금의 교육현실이 여러분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불가피한 일입니까? 그 정도 희생은 당연히 치러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봐야 진정한 경쟁력이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그 이전에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해마다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60만 명의 아이들로부터 빼앗을 권한이 저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육의 목표를 지금처럼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에 둘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으며 최소한의 상식과 학습 역량을 가진 민주시민을 키워내는 것으로 잡고 우리가 가진 역량을 모두 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식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 귀한 줄부터 알아야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벌하고 살인적인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아야 하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내 생존을 위협할 뿐이며 내가 짓밟고 올라서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식의 소름 끼치고 무시무시한 생각을 품게 되는 괴물이 아닌, ‘나 자신이 귀한 만큼 다른 사람도 귀하다.’ 라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수 있고 현재 교육 체계가 요구하는 정형화된 답을 찾아내는 학습능력이 아닌 스스로 묻고 생각하며 답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생각의 폭을 넓히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역량을 지닌 민주시민으로 우리 아이들을 길러내자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승자독식, 약육강식 논리만이 횡행하는 살벌하고 살인적인 현재의 무의미한 입시전쟁은 그만두고 미리 정해놓은 정형화된 정답을 객관식 문제에서 찾아내는 과정을 반복해 생각의 틀을 가둬버리는 방식도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생각하거나 고민해보지 않은 교육이 보편적으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제 답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주시민 육성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저의 답이 낯설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허황된 주장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이고요.

 

우리는 초중고 12년간 학교를 다니며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존재 의식에 대해 진지하고 깊게 생각하거나 고민해볼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교육을 통해 자신이 꿈꾸는 삶,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던 것이었죠.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없는 불행한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자신을 틀 안에 가둬버리는 생각의 틀을 과감하게 깰 수 있다면 우리 부모 세대, 우리 세대, 그리고 지금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받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의 교육이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주시민 육성이라는 대전제가 우리 교육이 추구해야 할 근본 가치임이 사회에 뿌리 내렸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모두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문제풀이 기계만 만들어내는 교육이 아닌, 한 명 한 명 모두가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토대를 교육이 뒷받침 할 수 있는 세상을 다 함께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명 한명이 자신의 삶에 만족 못하는 불행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0.4%, 1.6%, 9.9%에 들지 못한 아이들도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마음껏 꿈꾸며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는 행복한 교육으로 가는 길은 저 혼자 가고 싶다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결코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같이 가주셔야만 길이 만들어집니다. 저와 함께 그 길을 같이 만들어 가지 않으시렵니까?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고 두 주 후 오후 3시에 뵙겠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쇼. 지금까지 여러분의 대통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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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응시생 통계는 2011년 기준으로 다큐프라임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구글에서 '인서울 대학 진학률' 로 검색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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