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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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뉴욕은 언제나 맑음?

 

 

    지금의 뉴욕은 과연 행복한 도시일까? 훤히 드러나는 마천루와 도시 곳곳을 채우는 관광객들, 손에 커피를 쥐고 돌아다니는 월스트릿의 회사원들은 뉴욕을 눈부시고 화려한 도시인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려함이 뉴욕의 전부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뉴욕의 뒷골목과 거리에는 화려함과 대비되는 그늘이 져 있다. 커피 한 잔 살 돈을 요구하는 거지들과 푼돈에 쫓기는 노동자들, 먹을것을 찾아 우발적으로 저지르는 생계형 범죄들. 이  어두은 모습도 뉴욕이다. 성공했지만 실패한 도시인 뉴욕에서, 마르크스는 진짜 실패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들이라며 손가락질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았던 런던 소호의 진창길의 노숙인들이 이백년가량 지난 지금의, 그나마도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자본주의의 중심인 뉴욕의 소호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며 한탄한다. 그리고는 그의 반성어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 경제가 현대세계를 양적으로 팽창시켰음에는 두말없이 동의한다. 그러나 그 반면에 "상품"이 인간의 "노동가치"를 앞서버린 부분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지적한다. 또한 인간이 아닌 상품이 주체가 되어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는 그 이면에 자본주의를 교묘히 이용하는 부르주아 계층들의 횡포가 있다고 폭로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해야 한다며 인간의 고군분투가 인정받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부추긴다.

 

    사실 그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도 우리를 나무랄 처지에 있지는 않다. 그도 사상가였을 뿐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인 예니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책에서도 그에게 직구를 날린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선언'을 졸리다고 표현하면서, 글보다 행동이 앞서는 혁명을 그에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딸인 엘레아느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엘레아느로는 직접 링컨 대통령에게 남부 연방군에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편지로 써서 부치고, 주일법에 대항하여 사람들을 조직했다. 즉, 그의 주변 가족들이 혁명을 말하고 직접 쟁취하기까지 한 모습을 회고하며 지난 세월동안 엉덩이에 뾰루지만 나도록 앉아서 글만 쓰고 말로만 사회주의를 외치던 스스로를 반성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되지 않기를 바라며 혁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그 사상 자체에는 결함이 없음을 책을 통해 다시한번 고수한다. 그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자신이 실패했다고 떠들어 대는 세상을 향해 호통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중심인 뉴욕이야말로 실패한 도시라며 그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을 조목조목 따져 살핀다. 노스 캐롤라이나 노동자들의 참사등의 사건들을 내세우며 지금 거리의 거지들이 과연 왜 생겨났는가에대한 반문까지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사리 해명할 수 없다. 분명한 이 사회의 문제점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나로서도 우리 사회의 실패들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한 적어도 모두의 승리라고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려 자본주의에 성공한 부유층이 있는 반면 노동자들은 패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가 세습까지 된다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의 연결고리를 영원히 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을 것이다.

 

    사실 세계는 아직까지 '진짜 사회주의'의 성공여부를 가려내지 못했다. 구 소비에트연방은 이 책의 마르크스가 말하듯 독재와 살인으로 얼룩진 가짜 사회주의 (스탈린주의) 였으며, 가장 이상적인 사회주의 공동체였던 파리코뮌은 성공을 앞두고 진압당했다. 또한 소비에트연방을 성공한 사회주의라고 치부하더라도, 결국에는 소련과 몇몇 국가들만 동참한 부분적 연합체였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혁명의 요건으로 제시했던 초국적 프롤레타리아 연합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뉴욕에서 제대로 시험도 해보지 못했으면서 사람들이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떠드는 것에 언짢아 한다. 

 

    그의 주장이 일리있게 느껴지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과연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상하관계를 무너뜨리고 평등 속에서 노동자 전체의 초국가적 연합체를 주장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소련의 모습은 괴리가 있어보인다. 노동자계층이 국가를 운영했으나 노동자 계층 안에서도 상부와 하부구조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스탈린과 그 친구들은 지배자 계층에 서서, 정치적 라이벌들을 숙청하고 국가를 그들의 독재속에 운영했다. 예닌은 이를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왜 혁명가들은 6명 이상 모이면 누구를 제명하지 못해 안달"이냐며 사회주의의 혁명가들의 모순을 지적했다. 또한 소련은 지나친 양극체제로 세계를 이원화시켜 '애국심'에 가린 경쟁구도를 양성시켰다. 이는 곧 동료가 될 수 있었던 다른 지역의 프롤레타리아들의 반발을 샀고, 사회주의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었다. 바쿠닌은 그래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펼쳤는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의 충고에 우리는 조금은 귀를 기울이고 경계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그가 예상한 국경없는 자본주의 세계가 오늘날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전 세계가 몇몇 소수의 자본에 의해 독점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초국적 자본력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주의를 수용한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힘든 실정이지만, 우리 사회에 내재된 부의 흐름을 다시 정리해보고 부당함 정도는 느껴야 하부에 불합리한 지금의 이 체제에 보완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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