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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평점 :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은 후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아마 그녀의 작품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주는 묘한 분위기에 매료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평범하지만 조금은 또 나와는 다른 주인공들의 모습에 푹 빠져들었죠.
<저물 듯 저물지 않는>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참 묘해요.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님께 물려받은 돈으로 한량처럼 살아가는 미노루도, 그의 누나인 스즈메도, 미노루의 친구이자 전속 세무사로 나이 어린 아내와 사는 오타케도, 동성 커플인 치카와 사야카도, 모두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요.
여러 인물들이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미노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니 그를 중심에 두고 볼 수밖에 없지요. 미노루는 어떤 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에요. 타고난 금수저의 삶을 살아가는 그가 전혀 부럽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 솔직하지 못한 말이니까요.
그의 삶은 오로지 책으로만 덮여 있는 듯해요. 이 소설의 구조가 소설 속 소설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소설 속 소설은 미노루가 읽는 장르 소설이에요. 첫 장면부터 소설 속 소설 이야기가 먼저 나와 약간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구성이 그가 얼마나 책 속에 빠져있는지를 알려주는 장치가 아닌가 싶어요.
미노루는 책 속에 너무 빠져 있어서 오히려 현실의 생활이 뚜렷하지 않아요. 누가 집에 들어오는지, 약속을 잊어버린다든지 등등 현실 속 그의 삶은 어쩌면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아요. 현실 속 나이에 비해서요. 그래서 <저물 듯 저물 지 않는> 제목이 붙었나봐요. 현실이라는 삶 속에 빠져들지 않은 미노루의 모습 때문에요.
저문다는 말이 주는 뉘앙스가 부정적이라 그런 걸까요?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사는 듯한 미노루가 정말 부러웠던 이유가요. 모르겠어요. 정말 그처럼 살고 싶은 지는요.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그가 마냥 부럽지만은 않거든요. 행복은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