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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체
이규진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서 본 듯하고 아는 듯하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지나치지 않았는지 돌아 보게 해 주는 책이다. 마치 정빈이 자운향을 처음 대면했을 때 느낀 그 묘한 기시감을 찾아 떠나는 듯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우리는 파체의 의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장헌세자의 죽음을 예수의 수난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이고, 그 수난을 통해서 조선을 구하려 했다고 믿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 적대자들을 용서할 수… 있… 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조의 애민정신과 고뇌를 이렇게 연결해서 풀어낸 것이 놀랍다. 백성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기시감이 예수의 사랑과 만나면서 그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이는 태윤과 정조가 나누는 치(治)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스릴 치, 다스린다는 것은 다 살린다는 것이 아닐는지요. 저는 그렇게 답하였습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잘 났거나, 못 났거나. 그 어떤 이라 해도 이 성안에 다 살게 하라. 복되게 살게 하라
사도세자에서 이어지는 정조의 애민 정신이 예수의 수난에서 이어지는 구원의 메시지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살리고, 눈물을 닦아 준다 했건만 주요 등장인물들이 거의 모두 안타까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면 이는 어찌된 일인가.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원하는 독자라면 혹은 이 이야기의 중간 과정을 모르는 독자라면 다소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모른다는 말일까. 모른다는 것은 이 책을 읽어가는 독자가 처음으로 서야 하는 바로 그 위치다. 독자는 정빈이 어째서 정빈이 아닌지를 모른다. 어쩌면 화성 행궁을 거닐면서도 삼구일타를 모르는 것처럼 당연히 그렇다. 이제 이야기는 정빈의 이야기와 화성 행궁에 담긴 정조의 소망을 축으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등장인물이 지닌 비밀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기시감을 넘어서서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매일 하루씩의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살아요.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영원한 죽음이 오겠지요.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는 때예요. 영원한 삶이 영원히 아름다우려면 지금 우리 곁을 지나가는 이 모든 순간을 온 몸과 마음으로 살아내야만 해요.”
정빈에게 전하는 유겸의 말을 통해서 온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 녹록치 않은 현실에 ‘의지할 곳’ 있음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여정은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정빈을 중심으로 한 등장인물들이 지닌 각자의 삶의 무게에 대한 의미 중심으로 진행된다. 정빈의 아픔을 알아가면서 독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탓일까. 차원일로 대변되는 신념의 희생양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또한, 정빈의 아픔을 알고 의지할 안식처가 되어 주는 유겸의 존재는 무엇일까. 보살핌 받는 듯 보이지만 보살피는 자. 가장 천한 듯 보였지만 가장 고귀한 자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어쩌면 우리는 기나긴 절망 끝에서 정빈의 진실을 깨닫고 나서야 모든 것을 용서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영신이 아닐까.
깨달음의 여정을 위해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저자의 역량 또한 놀랍다. 정빈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게 된 독자들은 그 의문이 확신으로 굳어져 갈수록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극복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어쩌자는 것일까. 이미 상황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뒤틀어져 있다. 어쩌면 원죄와 같은 것이다. 파국을 면할 수 있을까 긴장하기 시작한 독자들은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에 수원 화성이 있다.
“성을 설계할 때 태윤은 천주신앙의 수많은 상징과 의미를 성 곳곳에 감춰 놓았다. 그것은 아는 자의 눈에만 보일 것이요, 믿는 자의 가슴에만 와 닿을 것이었다”
각 등장인물 속에 새겨진 비밀과 의미들처럼 화성의 곳곳에 자리잡은 천주교의 상징들을 접하는 것도 또 다른 읽는 재미다.
“수문은 무지개 모양이 좋겠어요. 무지개는 다시는 물로 벌하지 않겠다 하신 그분의 증표입니다… 일곱 개의 문은 그분께 다다르는 일곱 가지 성사를 뜻합니다… 수문 아래는 네 개의 돌 계단을 설치해 주세요… 우리에겐 네 개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만 둘러 보았던 화성에 다시 한 번 들르게 된다면, 이번엔 그 겉이 아닌 그 속을 보게 될 수 있겠단 기대가 든다. 평생 정빈의 겉만을 보았던 태윤이 마지막 이후에서야 어째서 정빈이 그러한 태도로 존재했는지를 깨닫게 되듯이 말이다. 우리도 화성에 담긴 그 의미를 안다면, 그 화성 벽돌 하나 하나에서 애민정신의 정조를 본다면, 그 시대를 살다간 그 영혼의 숨결을 느낀다면, 우리는 드디어 절망과 원망과 고통에서 벗어나 파체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읽는 이의 마음 속에 흐르는 눈물이 멈추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리라 믿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문득 수원 화성에 다녀 오고픈 잔잔한 열망이 드는 건 왜일까.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한 저자의 마음이 전해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