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내 안에 마법이 흐르고 있었다는 말을, 그러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릴 적, 아버지는 내가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싫어하셨다. 아니, 싫어하셨다기 보다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다는 말이 더 적확하겠다. 단단한 현실의 벽을 먼저 넘어선 선구자로서 뒤이어 오는 인생의 후배가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 앞에 놓일 굳건한 벽을 부술 커다란 망치를 얻길 바랐던 것이다.

그런 내가 판타지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20살 여름, 무던히도 덥던 어느 여름 방학의 밤이었다. 시간이나 때울 겸, 도서관에 가서 빌려온 이영도 작가님의 <눈물을 마시는 새>였다. 책을 펼치자 신묘한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발자국 없는 여신의 선민종족인 나가 , 자신을 죽이는 신의 가호를 받는 도깨비 ,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레콘, 어디에도 없는 신의 인간, 그리고 오만함으로 인해 신을 잃었다고 알려지는 두억시니로 구성된 세계는 몰입을 넘어선 경외감을 주었다. 그 이후로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난무하는 <해리포터>나 방대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반지의 제왕> 같은 유명작을 보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화려함에 물든 눈을 딱딱해보이기만 하는 책으로 돌리기에 어려웠다.
그렇게 나는 판타지 소설과 다시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근 15년 만에 다시 잡은 판타지가 바로 <업루티드>였다.

영화 <판과 미로>만큼 음울하진 않지만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책은 인간의 탐욕을 빨아들이는 오염된 숲 '우드'의 재앙을 막아온 드래곤(사람이다)과 올해로 열일곱이 된 천방지축 소녀 아그니에슈카의 성장기를 그린다. 꽤 많은 장수임에도 술술 읽혀, 회사나 개인 이동 시간 등 짬짬이 읽다보니 3일 만에 끝을 보았다. 내용 자체의 흡입력도 상당하고 인물들도 매력적이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암흑의 세계이자, 어둠의 숲인 '우드'의 옆 골짜기 마을에 살고 있는 아그니에슈카. 그녀의 마을에는 영주이자 마법사인 드래곤이 살고 있다. 그는 10년에 한번 '꼭' 17살인 소녀를 자신의 성으로 데리고 가고, 10년이 지나면 그 소녀들을 다시 성 밖으로 내보낸다. 그 사이 소녀들은 예전의 모습이라고는 1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뀌어 돌아오는데, 10년동안 성 안에서의 일은 그 누구도 알지 못 하였기에 드래곤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일지만 마을 주민 누구도 그를 내치거나 뭐라하지 못한다. 더 큰 재앙인 '우드'로 부터 마법사가 자신들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아그니에슈카가 열일곱이 되던 해에도 마법사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 해에는 동네의 모든 사람들, 하물며 '카시아'(아그니에슈카의 친구) 본인 마저도 자신이 그 해의 제물로서 드래곤에게 잡혀갈 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녀는 영특하고 예뻤으며 고귀하고 기품이 있었다. 또한 드래곤은 항상 가장 예쁘거나 가장 특별한 소녀를 성으로 데리고 갔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녀가 성으로 가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성의 제물로 잡혀간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아그니에슈카는 드래곤을 두려워하는 한편 미워한다. 그런데 그 해의 제물은, 카시아가 아니라 아그니에슈카가 된다. 잘하는 것이라곤 옷을 엉망으로 만들어가며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과일이나 식물을 한 그득 캐우는 것이 장기의 전부인 평범하디 평범한 그녀가 말이다. 그렇게 왜 자신이 끌려가는지 영문도 모른 체, 부모와 작별인사도 못하고 성으로 잡혀가는 아그니에슈카.

그렇게 시작된 드래곤과의 생활에서 아그니에슈카는 드래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성에서의 생활을 해나가지만 점차 왜 자신이 카시아 대신 선택이 된 것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특히 오랜 벗 카시아가 우드에게 먹혀 들어갈 뻔한 상황을 통해 장시간의 방황을 불식시키고 마녀로서의 사명감을 불태우는 그녀. 그리고 시작된 '우드'의 거센 위협과 그것으로 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냉철한 영주 드래곤과 씩씩한 마녀 아그니에슈카의 이야기가 장장 670여 페이지에 대해 그려진다.


군인들에게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칼에 베인 모든 상처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열린 창밖으로 날아가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나자 그들은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살아 있기에는 너무 많은 상처를 입은 인간. 그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쓰러졌다.

자신을 한번도 특별하다 여기지 않던 평범한 소녀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차례차례 큰 일을 해결 해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범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가며 어떤 일들을 해결 해 나가는 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들었다. 그녀처럼 모두를 구하고 모두를 화해시키지는 못하겠지만 나 자신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모두를 구하고 모두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는 오늘의 내가, 뭔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읽어내려가던 책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니 굉장히 좋았다. 재밌었다,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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