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 인디언 아이들은 자유롭다 - 문화인류학자가 바라본 부모와 아이 사이
하라 히로코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한울림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그 곳에 머무는 동안 '이런 걸 못하다니!' 하는 마음이 들 때 보다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위험한 일을 하다니!' 라고 놀라는 날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
교육(敎育)을 정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실 가르침이 곧 배움이라는 사실의 범주를 정하는 일도 어렵다. 어떤 것들을 가르쳤다고 하여 그것이 청자에게 직접적으로 배운다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 '해어 인디언 아이들은 자유롭다'는 어쩌면 그런 의문에서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작자의 말처럼 사람들은 중요하다고 느끼거나 그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중심으로  무의식적인 선택에 따라 '기억'을 한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가르친다, 배운다'는 행위가 각 문화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인간사회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으나 '가르친다, 배운다'는 행위 자체는 절대보편이 아닐지도 모름을 해어 인디언 아이들을 보며 역설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5살 아이가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려고 하면 그 행위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는 혹시나 아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회에서 보통의 사고방식을 가진 저자 히로코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전공으로 하던 '문화인류학'의 연구를 위해 캐나다 북서부에 위치한 타이가 숲속에 살고 있는 해어 인디언 부족의 삶 속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다섯살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려고 한 것이다. 그녀가 위험하다고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아이는 보기 좋게 통나무를 두 쪽으로 쪼개었다. 단순히 장작패는 방법을 누군가가 가르쳐주어, 바로 그것이 배움으로 승화된 것이 아니라 여러번의 실습을 아이가 본인에게 필요한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어 인디어족은 아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통해 배움으로 승화시키도록 둔다. 칼에 베여 그것의 위험성을 알게 두거나 달아오르기 시작한 난로에 데이게 두어 그것의 쓰라림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너무 위험할 때는 칼을 빼앗거나 다른 곳으로 관심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위험보다 아이가 하루 빨리 칼을 다룰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도록 두고, 그것을 통해 위험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위험보다는 '자르기'나 '쪼개기' 같은 행위를 통해 원형의 무언갈 망가뜨리고 그로 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 아이가 특정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는 심부름을 해주고 그것의 셈을 주인과 협상으로 깎아 개인의 이득으로 챙기는 아이의 모습이나 그게 어떠한 일이든 몸싸움은 죄악이라 여기며 모든 걸 말로써 서로 타협점을 찾으라는 오랑 자바들의 예시를 통해 '가르치다, 배우다'가 보편적인 것이 아님을 덧붙인다.

 

 

"해어 인디언 어른들은 아이들을 낳고 돌보는 게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지나치게 조심스레 키우지도 않습니다. 그저 담담하고 즐겁게 아이들과 살아갑니다.
-
이 책은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견고하지 못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지 우간다 북쪽 케냐와 수단의 경계에 사는 이크 족의 사례를 들어 보여준다. 그러면서 여러 부족들이 아이를 대하는 방법을 들어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진다.

 

물론 큰 줄기는 '가르치다와 배우다'는 행위에 관한 것이기에,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이야기가 본래대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앞서 이야기했듯 해어 인디언 아이들은 누군가로 부터 학습하여 배워 익히기 보다는 자유롭게 스스로 습득하고 익히는 것이 보통이기에 '누구에게 배웠냐?'라는 질문 자체를 이해 못한다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해어 인디언 말에 '누구에게 배우다'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익혔냐?'거나 '어떻게 할 수 있게 되었냐?'라는 식으로 되묻자 한결같이 '스스로 익혔다'고 답했다고 했다. 해어 인디언 문화에는 '가르친다, 배운다'의 개념이 없고 '스스로 관찰하고 해 보고 수정한다'는 과정을 통해 '무언가 익힌다'로 인식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작자는 마지막에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배우기'에 바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조금 여유를 가지고 '스스로 익히는 기쁨'을 가져보자고 한다. 그들보다 조금 더 큰 어른들은 그들이 잘 해낼 때까지 천천히 두고 보기를 고대하며 말이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저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얼마나 즐겁게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행위에서 '기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힘들겠지만 천천히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물론 나부터 나의 아이에게 그래야겠지만 말이다.

 

아이를 키움에 있어 또 다른 교육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