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화창한 중년입니다
사카이 준코 지음, 이민영 옮김 / 살림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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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순수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가. 그리고 이렇게 순수한 그녀도 이십 년 후에는 나처럼 되어버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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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해, 단지 삶의 경험들이 쌓여가는 시간의 축적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사람의 삶에 있어서도 소중한 '첫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시쳇말로 어른들이 '나이 든 사람 이야기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할 때조차도 그들이 이미 다양한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을 체득하고 있는 완성형이라고만 생각을 했지, 우리에게 말하는 자신의 그 숱한 경험들이 사실은 그들도 태어나 처음 겪은 일들이 쌓인 축적물의 집합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으레 나는 어른이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어떠한 일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처음 해보는 일들이 많고, 가끔은 그런 첫경험 속에서 풋내기 같은 실수를 할 때가 더러 있어 못내 속상한 참이었다.

 

더욱이 며칠 전 팀장님으로 부터 싫은 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 팀장 : A야. B대리 출산휴가 갔으니 네가 대신 기성고 작성해서 제출해라.
- 나 : 기성고 작성을 인수인계받긴 했는데 아직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 팀장 : 임마. 니가 들어온 지 몇 년차인데 그런 거 하나 못하냐. 나이도 있고하니 눈치껏 B대리 작성한 거 보고 대충해서 올려.
- 나 : 안 그래도 지금 보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얼른 작성해서 제출하겠습니다.
- 팀장 : 그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공부까지 하냐, 임마. 다른 할 일도 많은데.

 

팀장님 본인이야 일전에 그런 업무를 해보았으니 그 일이 별 거 아닌 거 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내게는 서른일곱 인생을 통틀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옆에서 누가 자세히 알려준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떠난 빈자리를 대신 메꿔야하는데 반해 인계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답답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억울한 '첫경험' 때문에 나는 적잖이 풀이 죽어 있었다.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걸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 '지금 나는 화창한 중년입니다'는 인생 후반에 겪게 되는 신선한 '첫경험' - 혹은 다시 마주하게 된 재경험이라도 나이가 들어 새롭게 다가오는 경험 혹은 기억 속에서 잊은지 오래된 경험- 들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그 순간들을 우울하거나 연장자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애써 무게를 잡아야 한다고 호통치며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저자 역시 절대 입을 것 같지 않던 거들을 사서 입고, 이사를 한다는 목적으로 최첨단 스마트폰을 새로 구입하며, 오래쓰던 작업용 컴퓨터 대신 맥북을 사서 사용하는 등, 그간 익숙했던 것들에게 이별을 고하며 익숙치 않은 것들에게서 다소 쫓기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겪는 일들로 부터 파생하는 생격함들을 잘 극복하며, 그것을 이겨내는 자신을 조금은 뿌듯하게 여겨도 된다는 투의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몹시 긴장된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 자체가 아주 오랜만에 경험하는 일이다. 그랬다. 나는 그런 ‘첫 경험’에 굉장히 서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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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처음 무엇인가를 한다는 건 생경하고 어색한 일이 맞다.

 

나이가 들어가며 그 감각을 잊고 살고 있었는데, 그 어색한 설레임이 이 책에 실려있어 너무 좋았다.  그것도 서른 중반에서 후반으로 치달아가는 - 혹은 중반의 시작 문턱에 서 있는 - 지금의 내가 느끼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어놓듯 적힌 구절구절들이 와닿았다. 책 중반 쯤 나오던 '몇 살이 되건 생일을 맞는 나이는 ‘태어나 처음’이다. 마흔다섯 살도 내겐 처음 겪는 일. 열 살,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이 되기 오 년 전부터 항상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와 같은 문장들 말이다.

 

아직 남은 생을 통틀어 여전히 처음 겪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음을, 그리고 그것을 오롯이 가슴으로 느끼며 어색해하는 일이 그다지 놀랄 일도, 창피할 일도 아님을 이 책은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동질감을 통해 모난 가슴에 살짝 위로도 받았다.

 

그렇다.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나 처음 겪는 일들은 분명히 있다. 또한 해보지 않은 일을 잘 할 가능성은 아무래도 적다. 이제는 그걸 인정하고 첫경험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여전히 그 일이 손에 익지 않는 어색한 나를 위로해주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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