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 일기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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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가족과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생일을 축하해 주지만 내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기일을 기억해 줄 것이다.” p.123

 

 

대학 강의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한 학기 동안 고대 그리스 철학자 10명 정도의 사상과 기록에 대해 배우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중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철학자를 고르라면 단연 헤라클레이토스가 떠오른다. 헤라클레이토스로 기말 과제를 작성한 이유도 있거니와, 삶의 유한성을 강조한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기록이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죽음을 의식하면서 사는 자만이 강렬한 삶을 산다.” 헤라클레이토스

 

 

나는 언젠가 죽게 된다는 인식이 바로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나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닥칠 일이 아니기에 나중에 생각해봐도 될 일로 생각하고, 언제나 우선순위의 뒤로, 또 뒤로 밀어놓는다.

물론 행복한 일만 꿈꾸기에도 모자를 시간에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썩 반갑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 죽는다.'를 항상 염두에 두며 생활한다면, 한 시간, 하루라도 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며, 본인에게 온전해질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죽음을 염두에 둔다면 더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매우 모순적이면서도 일리 있는 말이다.

 

 

인생은 과거를 기념하기 위한 골동품이 아니다.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항상 새로운 출발이어야 한다. 밀알이 더 많은 열매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듯이.” p.59

 

 

백세 일기는 관록이 차야만 가질 수 있는 여유와 관용이 어우러진, 삶의 석양이 찾아든 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백세 일기의 저자 김형석 작가의 연세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올해로 100세이시다. 미역국과 떡국을 100번 잡수셨으며, 계절의 순환을 100번 경험하신 셈이다. 나이가 지혜와 경험의 척도가 될 순 없지만, 백세 일기를 일으니 확실히 연륜을 무시할 순 없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많은 짐을 갖지 않는다. 높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거운 것들은 산 아래 남겨두는 법이다. 정신적 가치와 인격의 숭고함을 위해서는 소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유는 베풀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즐기기 위해 갖는 것이 아니다.” p.168

 

 

높은 정상을 향함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 갈수록 경사가 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기에 가져온 짐을 하나씩 벗어던져야만 한다. 끝내 정상에 도착하고 보면 등에 멨던 백팩과 주머니 곳곳에 넣어둔 비상식량은 어느새 사라져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라져야만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청년의 지성을 갖춘 용기는 소중하다. 장년의 가치관이 있는 신념은 필수적이다. 노년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도 있어야 한다. 3세대가 공존할 때 우리는 행복해지며 사회는 안정된 성장을 누릴 수 있다.” p.230

 

 

한국 사회에서 청년과 장년과 노년 간의 세대 갈등이 심각하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일원이 알고 있을 것이다. 청년은 위 세대를 꼰대로 싸잡아 부르고, 그들의 조언 자체를 거부하고 때론 일궈온 업적을 폄하하기도 한다. 위 세대는 청년을 말 안 듣는 철부지로 본다. 서로 혐오하기 바쁜 세상이다. 동시에 모든 세대는 알고 있다. 청년, 장년, 노년이 공존해야만 사회가 돌아가며, 공존해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김형석 작가는 백세 일기에서 이 사실을 조언이나 가르침이 아닌, 설득의 어투로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긋이 말한다.

 

 

그리운 고향에 갈 수는 없지만 마음 둘 고향이 있어 감사한 일이다.” p.103

 

 

김형석 작가는 어린 시절을 평안북도에서 지냈다. 이후 탈북하여 한국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태어나서 자란 곳인 고향은 그리움과 치유의 공간이다. 하나, 가지 못한다면 이는 상상 속의 공간과 다를 바가 없다. 남과 북이 갈라졌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김형석 작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백세 일기에서만 봐도 크다고 짐작된다. 그럼에도 김형석 작가는 그리움에 매몰되어 과거에 갇혀 살지 않는다. 고향의 그리움에 대해 말하면서 새로이 찾은 고향이 있음에 감사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탓할 것이 아닌, 일말의 감사를 찾아내는 작가의 태도는 초연함과 건강한 삶의 태도를 일러준다.

 

 

일기는 나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p.7

 

 

기록은 인간만이 갖는 차별화 중 하나다. 인간은 현재 얻은 정보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기록하며, 정보의 축적을 유전자만이 아닌 글과 그림, 음악 등 오감을 통해 체화하게끔 한다. 일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거의 나를 적고, 훗날 읽어 회상에 잠기기도 하며, 당시의 사건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일기를 통해 그때의 나를 사랑하게 되고, 그때와는 달라진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 나뿐만이 아니다. 내 일기에 등장하는 사람 역시 사랑하게 된다. 무엇보다 일기는 나의 상태를 기록함으로써 즐거운 회상을 가능하게 하며, 다시 읽으면 매우 매우 재밌다.

 

끝으로, 백세 일기는 조언을 겨냥하여 쓴 책이 아님이 틀림없다. 따라서 삶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자 한다면 백세 일기가 큰 도움이 되진 못할 것이다. 가볍지만 우습지는 않은 마음으로, 남의 일기를 훔쳐보듯이 읽는다면, 그 방심의 순간에서 응축된 한 세기의 삶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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