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 자본700페이지 가량 되는, 흔히 벽돌 책이라고 불리는 책이다. 책의 두께와 무게에 압도되어 읽을 엄두가 안 나기도 한다. 페이지의 수와 책의 두께는 책이 주는 경고와도 같다. 읽기도 전에 은근히 쫄게 된다. 그만큼 읽고 난 후의 성취감이 크기도 하며, 반대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활자에 쫓기다가 책장을 덮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어렵다. 책에 등장하는 각종 경제학 용어에 대한 정의 이해가 필수이며, 전공자가 아니라면 읽을 동기가 없기도 하다. 나 역시 비전공자이며 21세기 자본를 베스트셀러 서가에 놓여있는 장식물로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21세기 자본의 리커버 특별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참에 읽어나 볼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읽었다. 동기는 언제나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불현듯 떠오르는 충동과 호기심일 때가 잦다. , 이제 비전공자의 리뷰를 시작한다.

 

 

언젠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획득하려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현한 구체적인 제도들이 끊임없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p.688

 

토마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4‘21세기 자본 규제의 마지막 문장이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는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경제 성장을 주도하고 능력주의로 환원되는 자본주의는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상적이고도 현실적인 구호를 달고 지금껏 달려왔으며, 앞으로도 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탄탄대로만을 달려온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의 금융위기는 모든 문제의 해답으로 여겨졌던 자본주의의 환상을 천천히 깨부수는 신호가 되었다. 점차 자본주의의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었고 허점이 드러났다. 부의 불평등, 부의 분배에 대한 불평등, 소득 불평등과 같이 자본주의는 갖가지 불평등이란 키워드를 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통제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영향력 안에서 자유로워야 할 자본주의가 되려 민주주의를 통제하기까지 한다. 아니, 적어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권을 확실하게 잃었다.

 

21세기 자본를 구성하는 핵심 공식 하나를 알고 가자.

 

r>g

 

풀어서 쓰자면, ‘자본 수익률>경제성장률이다. 자본이 자본을 재생산하여 얻는 수익(임대수익, 이자수익, 배당수익 등)이 생산과 소득으로부터 얻게 되는 수익을 넘어선다는 공식은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에도 물론 그랬으며 현재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완화될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r>g는 결국 부의 분배에 대한 불평등과 부의 집중, 소득의 불평등을 드러낸다.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더 번다는 말은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부터 저기 유치원생까지 다 아는 상식이다. 근데 우린 이에 대해서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인지하고 불만을 품지만, 그들만의 리그, 범접할 수 없는 어나더 레벨로 생각하고 애초에 다가갈 수 없는 세계로 본다.

아무리 그래도, 부의 불평등의 정도를 수치로 보게 된다면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불평등의 정도가 가장 심한 2010년의 미국을 놓고 봤을 때, 노동으로 얻는 소득인 노동소득,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노동소득의 35퍼센트를, 하위 50퍼센트가 전체 노동소득의 20퍼센트를 갖는다. 노동소득의 분배 차이가 심각해 보이지만, 이는 자본에 비교했을 땐 양반이다. 자본 소유는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자본의 70퍼센트를, 하위 50퍼센트가 5퍼센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을 합친 총소득에선, 상위 10퍼센트가 총소득의 50퍼센트를, 하위 50퍼센트가 총소득의 20퍼센트를 지닌다. 다음은 표로 정리한 것이다.

 

미국 2010년의 노동소득, 자본소득, 총소득의 불평등

서로 다른 집단들이 총노동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

노동소득

자본소득

총소득(노동소득+자본소득

상위 10퍼센트

35%

70%

50%

하위 50퍼센트

25%

5%

20%

 

노동소득에서만 보아도, 상위 10퍼센트가 발휘하는 영향력과 지분이 하위 50퍼센트의 총합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본소득에 와선 상위 10퍼센트가 하위 50퍼센트의 14배에 달하는 영향력과 지분을 갖는다.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을 합친 총소득은 자본소득만큼의 격차는 아니지만, 상위 10퍼센트가 하위 50퍼센트의 1.5배에 달하는 영향력과 지분을 가지며, 부의 집중과 분배의 불평등의 명확함을 시사한다. 또한 자본과 관련된 불평등이 항상 소득과 관련된 불평등보다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불평등의 정도가 가장 심한 미국의 2010년을 놓고 본 것이지만, 그보다 불평등의 정도가 낮은 유럽의 2010년도 만만치 않다. 다음은 유럽의 2010년 노동소득, 자본소득, 총소득의 불평등을 표로 나타낸 것이다.

 

유럽 2010년의 노동소득, 자본소득, 총소득의 불평등

서로 다른 집단들이 총노동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

노동소득

자본소득

총소득(노동소득+자본소득

상위 10퍼센트

25%

60%

35%

하위 50퍼센트

30%

5%

25%

노동소득과 총소득의 비율은 미국의 2010년에 비교적 불평등의 정도가 낮지만, 자본소득만은 미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위 50퍼센트의 자본소득이 5퍼센트란 점은 미국과 일치하기까지 한다.

위의 두 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r>g가 역전되는 경우는 없단 것이다. 물론 완화되었던 시기가 있긴 했다. 바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중일 때이다. 이처럼 극적인 상황이 왔을 때를 제외하곤, 벨 에포크(프랑스의 정치적 격동기 끝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기간,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란 의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r>g는 항상 성립되었고, 자본이 자본을 재생산하여 부가 집중되는 현상은 다시금 심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토마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글로벌 누진세를 제안한다. 글로벌 누진세란 지역, 국가에 제한되어 적용되는 누진세가 아닌, 전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누진세를 의미한다. 현재의 과세체계는 고소득에 역진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 국가의 고소득자에 대한 과세가 높을 경우, 고소득자는 높은 과세를 피하기 위해 해외로 부를 도피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부의 유출로 해당 국가에 피해를 주기에 결국 국가는 부의 유출을 피하기 위해 고소득자의 부에 대해 역진적 체계를 갖추게 되는 모순을 낳는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글로벌 누진세이다. 전 세계적으로 누진세가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고소득자가 해외로 부를 피신시키는 행위가 의미를 잃게 될 것이며, 해당 국가에 자본을 붙잡아두는 것과 동시에 늘어난 세수로 국가 재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글로벌 누진세의 가장 큰 목적인 부의 무한 확대 방지를 통해 부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누진세는 고소득자에게 달가운 소식일 리가 없으며, 공격성이 짙은 주장으로 비추어지기에 부를 지닌 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합의를 도출하기 어려울 우려가 크다. 따라서 글로벌 누진세의 세율을 어느 정도로 측정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과연 글로벌 누진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가, 글로벌 누진세를 현실로 도입하기 위해서 어떤 보완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누진세를 적용하는 글로벌 누진세의 이상성을 보완하는 현실적 요소로 토마스 피케티는 금융 투명성을 제시한다. 금융 투명성을 이루기 위한 기술은 현재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실현할 기술은 있지만, 과연 금융 투명성 역시 합의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자본가들이 절대 달가워하지 않을 소식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금융 투명성을 실현하려 한다면 오히려 자산을 미리 은닉하거나 제대로 신고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선행될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외에도 21세기 자본에선 과거의 프랑스와 유럽의 데이터와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과거부터 이어온 부의 불평등을 직시하게끔 한다. 이를 위한 해결 방안으로 상속세와 기부 등을 제시하기도 한다. 본고에서 전부 다루기엔 나의 역량이 부족하기도 하며, 나만의 주관이 확립되지 못하게 되는 부분도 많았기에 내용 면에 대한 리뷰는 여기서 마친다. 그럼에도 부족함을 알게 된 만큼, 채워야 할 방향과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이자, 21세기 자본서장의 첫문장이다. 돌고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평균을 유지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차별이 필요하며, 양성평등, 부의 분배와 같이 차별 없인 균형을 잡을 수 없는 문제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차별이 공익을 위함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러나 현재 공익을 바탕에 둔 차별이 남아 있는가? 공익을 뺀, 차별을 위한 차별만이 존재하지는 않는가? 이러한 물음이 생기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태이다. 부가 불평등을 낳으며, 불평등이 또 다른 부를 낳는다. 부와 불평등은 평생친구가 틀림없다. 이 둘은 잉여생산물의 탄생 이후부터 쭉 함께였으며, 단언컨대 앞으로도 함께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관심을 각각 다른 곳으로 돌려 사이를 살짝 멀어지게 할 수는 있다. 떼어놓을 수는 없지만, 거리두기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와 불평등의 거리두기 캠페인을 토마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을 바탕으로 주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