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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입 ㅣ 창비시선 245
천양희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내가 세상에 와 입은 옷은 몇벌이었나 옷은 제 옷을
셀 수 없네 몇십년 입은 옷 그게 바로 내 그림자 내 남루지
누군들 헌옷처럼 남루한 적 없었겠나 몸이 울 때 헐은 마음은
수고로워 새옷 입고 싶네 옷 입는 일은 늘 그렇지 습관처럼 관습처럼
나를 따라다니지 내가 세상에 와 처음 입은 옷은 무엇이었나
옷이 처음 본 것은 누구였나 지나간 건 다시 오지 않듯이 처음은
언제나 끝이 되고 말지 그래도 끝나지 않는 것은 한 몸에
빛과 어둠을 입고 벗는 옷 그러는 동안 여기까지 왔네 옷의
일생은 늘 그렇지 그대여 옷이란 그런 것이네 옷과 함께
잘 낡아가는 것이네
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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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신이 만든 이 세상은, 애초에 그 자체로 완벽했고
사람은 스스로의 망상으로 무언가를 더하려고 일생을 애쓰지만
잘해봐야 결국은 원래 있던 그 무엇 하나를 발견하는 데 그칠 뿐
세상의 어떤 무엇도 더하거나 빼지 못한다는 생각.
그동안 나는 다만 낡아지고 헐거워지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에 안절부절, 간이 콩알만해지고 허파가 쪼그라든다는 생각.
인간이 꼼짝없이 낡아지는 동안, 우주는 어김없는 질서 속에서 무한하다는 생각.
그 무한함도 신 앞에서는 무용할 것이라는 생각.
인간의 낡음도 필연적인 우주의 질서속의 하나라는 생각.
세상의 어떤 것, 나무와 꽃과 온갖 짐승들도 일생을 태연히 그 질서에 순응하는데
오직 나만, 벌벌벌, 두려워 몸살 난다는 생각, 고등동물은 커녕, 내가 제일 하급이라는 생각.
그 두려움에 대한 어설픈 반항으로, 오히려 자신을 망치고 지구까지 망쳐버리고 있는 건,
오직 나, 인간이라는 생각.
나는 언제쯤에야 시인처럼
그대여, 옷의 일생은 옷과 함께 잘 낡아가는 것이라고
그대여, 나의 일생이 나와 함께 잘 낡아가는 것이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