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신은 뇌 - 뇌를 젊어지게 하는 놀라운 운동의 비밀!
에릭 헤이거먼. 존 레이티 지음, 이상헌 옮김, 김영보 감수 / 녹색지팡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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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몸을 가꾸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이들은 많다. 여름철이 다가오면 젊은이들은 바닷가에서 육체적 자부심을 표현하는 순간을 위해 운동을 한다. 고작 여름철 두 달을 위하여 사람들은 기꺼이 헬스클럽에서 결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한다. 나이든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노후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한다.


보통은 신체의 건강함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지 "뇌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한다?" "운동으로 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막연히 생각해보면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하며 뇌건강을 위해서는 머리를 자주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상식적인 이야기가 절반만 옳다는 것은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인간의 뇌는 원래 책을 읽기 위해 혹은 추상적 사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뇌의 근본적인 목적은 1차적으로 신체를 자유롭고 정밀하게 움직이기 위한 것이었다. 뇌는 여기서 중요한 사령탑을 맡고 있다. 따라서 신체를 단련할수록 뇌도 건강해진다. 운동을 통해서 정신과 육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오히려 체육 수업이 줄어들고 있다. 공부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과도하게 체육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한국은 높은 점수를 받고 있지만 핀란드 학생이 투자한 시간에 두배를 투입하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비효율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답은 간단해졌다. "정신적으로 가라앉고 우울한가?" " 정신적 컨디션이 좋지 앟은가?" "육체적으로 기운이 없고 몸이 무거운가?" 그러면 운동을 시작하면 된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운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 정신과 육체를 최적의 상태로 만드는데 운동만한 것이 없다. 게을러 터져서 못했던 운동. 이제는 운동을 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생겼다. 육제적 건강과 더불어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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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 ㅣ Meaning of Life 시리즈 1
줄리언 바지니 지음, 문은실.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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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는 뭘까?"


이러한 삶의 물음은 언어의 오용인가 정신적 질병인가 아니면 합당한 철학적 물음인가? 돌이켜 보면 나는 인생이 문제 없이 돌아 갈 때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정신이 건강할 때 실존에 대한 물음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삶이 팍팍하고 어려울 때 이런 문제에 골몰하는 것은 어쩌면 철학적 질문을 가장한 정신적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골몰하는 것이 아주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유의미하다는 생각으로의 태도 전환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낸다면 곧 바로 "그렇다면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난감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나는 세계와 인간의 근원적 비밀이 풀리면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왔다. 하지만 이는 곧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창조주가 인간을 만든 이유가 생각했던 것 보다 초라한 이유였다면 혹은 내가 원하지 않는 목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과연 인간이 그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받아 들일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해답을 들었을 때 과연 인간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마 인간은 분노와 함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의미와 목표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던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에도 다르지 않다. 유전자의 운반체라고 해서 인간의 지위가 폄하되거나 평범한 생활양식과 목적이 바뀌진 않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다루는 이 책은 유쾌한 표지와는 다르게 다소 진지한 주제인 궁극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시작한다. 그는 이 물음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몇 가지 해답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위에서 말했던 우리의 근원을 알게 되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발생론적 주장. 삶의 목표와 목적을 설정하고 이루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목적론적 주장과 자신 보다 더 거대한 인류라는 커다란 보편적 가치가 삶의 궁극적인 의미라는 주장. 더불어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와 같은 주장 등등 11개의 주장들을 차례로 기각하며 마지막에는 조심스레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정돈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삶의 의미는 단답형으로 쉽게 답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독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책 몇 권을 읽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건 오만한 생각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여러 주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논박을 통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해준 것이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삶의 무의미함에 저항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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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박영진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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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철학을 고귀한 지적 작업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멸했었다. 그에게 철학은 자신을 괴롭히는 철학적 문제를 도려내는 실존적 문제로 보았다. 그 자신에게 철학적 물음에 고심하는 것은 하나의 질병이었다. 따라서 철학적 해답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해소'하는 것이었고 더 이상 철학하지 않는 삶을 원했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바디우는 그에게 라캉의 말을 빌려 '반철학자'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반철학이란 철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 사도바울과 마찬가지로 삶으로서 몸소 증명하며 '철학을 깨우는자'를 말한다. 바디우는 철학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의 해체활동에 대해 아마도 이론으로서의 철학을 위협하기에 그에 대해 대응을 하는 것일 것이다.


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태도가 옳다고 본다. 바디우는 철학으로 밥 먹고 살지만 먹고 사는데 바쁜 사람들에게 고심하게 만드는 철학적 물음은 사라져야 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철학적 수수께기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발 붙인 대지에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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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니체 ㅣ How To Read 시리즈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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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하는 실재 보다는 생성을 중시했으며 그에 따라 형이상학적 실체 보다는 생성하는 이 지상의 현실을 긍정하기 위해 분투한다. 니체는 지상의 세계 보다 천상의 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를 공격했으며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플라톤의 이원론을 지독하게 붙잡고 흔들어댄다. 


도덕의 계보


형이상학의 죽음에 대한 은유로서 신의 죽음. 그에 따른 유럽의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해 치열하게 사유한다. 그의 사유방식은 프로이트가 의식의 밑에 깔려 있는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처럼 도덕아래에서 어떤 '의지'를 읽어내기 위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가령 권력의지를 버리려는 금욕주의자 마저도 그 아래에 의지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삶의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이러한 생각을 스스로 부정하고 고귀하고 고결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척하는 위선적이고 허위적인 태도를 드러내어 폭로하는 것이다. 니체의 글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그는 우리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추어진 모습을 굳이 벗겨버리고서 비판한다. 도덕의 기원과 맨얼굴을 정면으로 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공동윤리보다는 개인윤리를 이야기 한다. 여기서 그에게 주인의 도덕이라는 귀족적 혹은 엘리트적 윤리학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신 개념을 토대로 인간에게 죄 개념을 부여하고, 신에 의한 죄의 심판과 최종적인 심판의 장소인 천국을 고안해내며, 그 목적을 위해 영혼불멸을 상정하고 선악이 확정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양심을 고안해낸다." 니체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도덕을 노예도덕이라고 비판한다.


니체의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비판은 어느정도 진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스스로 도덕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그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니 대뜸 플라톤의 책이 읽고 싶어진다. 플라톤이 그렇게까지 잘못했는가. 니체의 비판은 심히 잔인할 정도로 비난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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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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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신경정신과 의사에 개인적 수기와 더불어 그 경험으로 탄생한 로고테라피를 소개한다. 죽음을 앞에 둔 실존적 인간의 여러 유형을 직접 경험하여 로고테라피 이론을 만들었다. 책의 절반은 절망적인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의 정신이 황폐화 되어가는 여러 심리상태를 그린다.

 

수용소 생활에서 오는 현실적 충격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모멸감 그리고 죽음 앞에 한갓 초라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정서는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불합리한 학살과 잔인한 폭력이 벌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덤덤해질 정도로 심리적 황폐화를 겪는다. 반면에 그러한 상황에서도 석양이 지는 것과 사소한 말장난을 주고 받으며 작은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절망의 가혹함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그 곳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면 그런 상황에서도 버텨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보고싶은 가족과 친구들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믿음은 인간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지만 그 믿음이 사실과 다를 때 오는 비통함과 좌절은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다. 

 

단적인 예로 크리스마스에 사망자 수가 많았다고 한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노동 그리고 사람들이 차례차례 소각로에서 검은연기로 변하는 상황을 맨 정신으로 버텨낼 수는 없었을 게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며 그 때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을 갖는다. 허나 여전히 자신은 크리스마스에도 나가지 못하고 작업을 하고 있으며 언제 끌날지 알 수 없고 또한 살아나갈 수 있을지 분명치 못한 현실을 직시했을때 정신력으로 생을 버텼던 인간은 차가운 현실 앞에 좌절하게 된다.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문제가 된다.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에서 보고싶었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환영받지 못했을 때, 그곳에서 사람들을 간절히 그리워했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을때 가령 "우리도 힘들었어요" "몰랐어요."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비통함과 환멸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고테라피 

 

어쨌든 이런 죽음 앞에 선 경험에서 나온 것이 로고테라피 요법이다. 로고테라피는 미래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정신질환을 일으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는 송환기제(feedback mechanism), 악순환 형성(vicious-circle formation)을 막는다. 그래서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정신병 중 일부는 실존적 문제일 것이다. 삶의 목적상실에서 오는 의미상실 그리고 상실감 후에 나타나는 불안과 자신에 대한 절망적 망상들은 더욱 증상을 악화시키거나 충동적 자살을 불러오는 요인이 된다. 미래라는 도로가 막혀 있을때 정신은 시간을 벗어나 과거의 추억으로 되돌아간다. 과거에 안좋았던 사건은 기억이라는 화살로 되돌아와 현재의 가슴에 꽂히기를 반복한다. 꽂힌 화살은 정신의 부정적 망상을 낳고 그것은 사실이 되고 현재의 심리상태를 뒤흔든다. 그래서 한 없이 현재의 자신은 초라해지고 비루해진다. 그리하여 아직 가보지 못한 미래라는 도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론 암흑처럼 덥칠지 모르는 두려운 그 무엇으로 비약하게 된다.

 

거대한 공포 그리고 삶 

 

사실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난 이유도 모르지만 그저 태어나 있어서 떠밀리다시피 살아가고 그러다가 늙고 병들고 모든 생물이 그렇듯 죽는다는 것. 이 명확한 사실에 허망함을 느낀 인간은 대리석에 형상을 부여하듯 말씀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지도 모른다. 죽은 망자의 육신을 보며 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천국이라는 형이상학적 내세를 만들고..

 

인생의 의미를 뻥튀기처럼 튀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생각 만큼 거대하지도 그리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어떤 일에 중압감이 크다면, 때로는 어린시절 재미있게 놀이를 했던 그 느낌으로 생각하면 안될까? 열정과 진지함? 놀이에 빠져 혼신에 노력을 기울이는 아이에게 그것은 진지하고 또한 스릴 있으며 소소한 행복이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장난감의 스케일이 변한 것일 뿐, 별 차이 없는 게 아닐까.  

 

아우슈비츠에서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소망과 가족들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하는 가족과의 만남과 소소한 취미활동 그리고 일이라는 것에서 따라나오는 행복일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감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들은 분명 거창한 행복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 누렸었던 소박한 행복과 안락함이 그들을 극한의 절망적 상황에서 견디게 해주었다. 간혹 삶을 너무 진지하고 무겁게만 느끼곤 한다. 하지만 작은 것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거창해져버린 비장한 삶이라는 옷을 벗고 가벼운 복장으로 쾌활하게 움직여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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