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우리가 죄로부터 보존받기 위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전제 조건으로서 깨어 있는 것에 반대 되는 사실은 영적 게으름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히브리서 6장 11~12절에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부지런함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게으르게 되고, 그 결과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1장 5~11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나 죄의 속임으로 인해 게으른 상태가 되면, 이 모든 것은 지성으로부터 사라질 것입니다.
죄를 범하려는 성향이나 자세 또는 죄를 범할 때 죄를 경홀히 여기거나 죄를 합리화하려는 태도 등이 정서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만일 새가 그물을 눈으로 낱낱이 보고, 멀리 날아가 버린다면, 새는 결코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속임도 정서를 미혹하기 위해 아무리 덫과 그물을 촘촘히 쳐 놓았다고 해도, 지성이 눈을 크게 뜨고 죄의 속임의 덫과 그물이 어디에 있는지 살핀 다음 의지와 감정의 날개를 사용하여 멀리 날아가 피해 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눈이 해찰을 하거나 다른 곳을 보고 있다면, 아무리 날개가 있더라도 그물을 피해 도망치는 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의 시선을 돌려놓는 것은 그물로 새를 잡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즉 이 말은 "너희 지성, 생각 또는 정서가 육체의 욕심을 만족시키는 데 알맞은 모양을 하고 있는 죄악의 대상들에 고정되어 그것들을 속에 품고 소중히 여기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절). 이 말은 곧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고 있는 죄의 역사와 유혹을 막아 내라."는 것입니다.
의지는 죄에 대한 용서가 클수록 은혜도 더 크다는 지성의 부패한 생각에 넘어가 죄에 대해 동의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신비한 이중적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죄의 최대의 목적은 이 이중적 은혜의 교리와 신비를 왜곡시키는 것으로서, 죄는 이 둘을 서로 어긋나게 함으로써 서로가 방해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고, 이 두 사실들에 대해 은혜의 영향을 차단시킴으로써 신자에게 아무런 발전이 없도록 획책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떤 사실이 무지로 남아 있습니까? 그러면 죄는 반드시 이 무지를 이용하고, 최대한 이 무지를 확대시키려고 획책합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삶과 행동에 있어서 도덕적 순결함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범하고자 했을 때 온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순결함을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창 20:5). 그러나 간음이 죄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곧 간음이 도덕적으로 정직한 사람을 얼마나 크게 더럽히는 죄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비멜렉의 욕심은 사라에 대한 음탕한 마음을 가속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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