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이윤 리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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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우리가 그 집 계약금을 치른 날에 죽었다. 계약금 그리고 죽음 네 시간 간격으로 차례로 벌어진 일. 내 소설이라면 절대 저 두 가지를 같은 날에 배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을 쓸 때는 저런 우연의 일치는 피한다. 손쉬운 비유와 조잡한 감상, 억지로 짜낸 극적 효과로 보이니까. 그러나 삶은 소설 작법을 따르지 않는다. 어쩌면 소설이 삶보다 덜 제멋대로인지도 모른다.”
이윤 리,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다산북스, 2026, p24.

✔ 베이징에서 태어난 미국의 작가 이윤 리는 두 아들을 자살로 떠나보냈다. 본인도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으며 그 이후 두 아들을 각각 자살로 떠나보낸 삶.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나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둘째 아들 제임스를 떠나보낸 뒤 쓴 이 에세이에서 나는 뜨거운 처절함 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현실 직시를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나였다면 세상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좌절감에 깊이 빠져 허우적댔을 것 같은데 저자는 제임스가 죽은 뒤 글도 쓰고 피아노도 배우러 다닌다. 엄청나게 뜨거운 불꽃은 빨간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뜨겁게 들끓는 가슴으로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 것이 저자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는 것은 힘들다. 살아가는 것은 더 힘들다. 삶이 영원한 죽음들로 부서지고 나서도 계속 살아가는 것은 더, 더 힘들다…(중략)…자식들은 죽고 부모는 계속 살아간다. 그 부모가 계속 살아 가는 이유는 그것이 자식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윤 리,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다산북스, 2026, p89.

저자가 그렇게나 괴로운 삶을 계속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두 아들을 사랑하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제임스를 떠나보내고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것 또한 저자 나름대로의 추모 방식일 것이다. 제임스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 저자는 글을 써내려갔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나는 저자가 위로도, 의미 부여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아직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 했다. 그런 내가 섣불리 저자의 마음에 공감하거나 그를 안쓰럽게 여기며 동정하는 것은 저자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읽고 그가 얼마나 두 아들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심연에 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까? 또한 내 주변에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섣불리 흔한 말로 위로하지 않고 그저 그의 슬픔을 함께 느껴주고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 계속 가져가야 하는 것임을 이해해주는 것을 바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의 문화에서 애도는 마치 종착점이 있는 하나의 과정을 가리키는 듯하다. 거기에 더 빨리 도달할수록 삶을 잘 살아가는 사람임을 더 빨리 증명하는 것이고, 주변 사람들도 덜 불편해질 것이다…(중략)…나는 내 슬픔에 종착점이 있기를 원치 않는다…(중략)…내 아이들을 생각하는 일은 공기와도 같고 시간과도 같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일은 내가 삶의 끝에 도달할 때야 비로소 끝날 것이다.”
이윤 리,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다산북스, 2026,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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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것들이 그저 자라는 것처럼 저자의 삶도 그저 흘러갈 것이다.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제임스가 죽고 나서는 계속 이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라다가 때가 오면 죽는다…(중략)…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자살하거나 분노하는 장미는 없고, 우울하거나 반항하는 백합도 없다. 식물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있다. 바로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고자 식물은 자랄 수 있을 때 자라고 그럴 수 없을 때 휴면에 들어간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그러다 자연이 정한 때에 죽거나 자연의 다른 요소 때문에 쓰러진다. 정원은 한 자리를 맡아놓고 있을 뿐이다.”
이윤 리,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다산북스, 2026,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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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몽테뉴의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지금은 다른 변주가 있음을 안다.
철학한다는 것은 죽음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철학 한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그 죽음들과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철학한다는 것은 길을 잃어서가 아니라 돌연 심연에 놓여 그곳에서 살아갈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윤 리,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다산북스, 2026, p43.

✔ 얼마 전에 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죽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의 죽음 이전에 수많은 죽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아직은 나와 아주 가까운 인물의 죽음을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나를 예뻐하시던 큰 이모부, 외할머니, 막내 이모가 돌아가셨지만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그들이 어디 먼 곳에 여행을 간 느낌이지 그들이 정말로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실감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사랑하는 친구, 연인을 잃는다면 매순간 그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빈센트가 죽은 날 밤 차마 눕지 못하고 밤새도록 뜬눈으로 앉아 있었다. 자는 것이 겁이 났다. 아침이 찾아왔을 때 아주 잠깐, 길어봤자 10초 정도겠지만,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서로 뒤바뀐 듯 느낄까 봐 두려워서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억하는 상태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두려웠다. 차라리 밤새 깨어 있는 것이 나았다. 착각도 환영도 없이 오직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심연만이 남아 있도록.”
이윤 리,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다산북스, 2026, p96.

아침이 찾아왔을 때 잠깐 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했다가 다시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얼마나 절망할지 그것이 두려워서 밤에 잠이 드는 것이 무서웠다니. 어떤 느낌일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즐거울 때는 시간이 금방 가지만 괴로울 때는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느끼면서 1분 1초가 얼마나 긴 시간인지 깨닫고 괴로워하게 된다.

“삶이 일과 의무와 행사로 가득차 있을 때면 시간에 정신없이 끌려가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계속 불평을 하지 않는가? 내 삶의 어떤 시기에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를 망각한다. 삶은 시간이 한결같이 우리를 끌고 갈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시간은 쏜살같이 순식간에 달아나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더는 가벼운 발도 날개도 없는 때가 온다. 그때부터는 우리가 시간을 끌고 가야 한다.”
이윤 리,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다산북스, 2026, p101.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살아만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예를 들면 불로불사의 몸인데 온몸의 뼈가 다 부서져서 못 움직이는 채로 아무도 안 오는 절벽 아래 떨어진다면? 아니면 식물인간이 되어서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다 느껴가면서 그 고독하고도 괴로운 시간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저자는 형이 죽은 뒤 둘째 아들 제임스가 그런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한다. 자신의 아들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며 자살이라는 선택을 했을지 이해해보려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사랑인가.

“몇 주 전 나는 데버라와 브리지드에게 파킨슨병을 앓다가 여든네 살에 조력자살을를 택한 작가 존 르뢰의 일을 물었다…(중략)…두 사람 모두 르뢰의 죽음을 자살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고통에서 해방되는 일이었어. 앞으로 좋은 게 모조리 병으로 얼룩지고 말리라는 사실과, 자기가 결단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돌보는 데 남은 인생을 바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식한 끝에 감행한 일이었지.”…(중략)…나는 제임스의 생각이 르뢰의 그것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윤 리,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다산북스, 2026,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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