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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여정은 여행과 어떻게 다를까? 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다가 제목으로 돌아가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여행이 완료된 사건이자 결과에 대한 판단의 영역이라면 여정은 진행 중인 사건이자 과정 그 자체이다. 여행이 끝나도 여정은 지속될 수 있다. 그래서 때로 여정은 물리적 이동과도 무관할 수 있다. ‘좋았던 여행’은 몰라도 ‘좋았던 여정’이란 표현은 어색하다. 여정은 완결이 아니기에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좋았다’가 최상의 표현일 것이다. 여정은 지금껏 쌓여온 것들의 토대에서 항상 다음을 예고한다.
알려진 것처럼 이 작품은 아톰 에고이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국내 개봉 여부는 모르겠으나 ‘펠리시아의 여행’으로 검색이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여행과 여정의 차이가 더 극명하게 다가온다. 원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설렘 가득한 이국적 장면들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가 펠리시아의 여정을 완결지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는 어색한 번역일 확률이 높다. 물론 책을 읽고 보니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면 펠리시아, 그 아일랜드 소녀는 왜 떠나는가. 여기서 시작해도 펠리시아의 행동이 여행이 아닌 여정인 이유로 닿게 된다. 소녀에게 떠남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공간의 유랑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몇 가지 선택지를 펼쳐 놓고 고른 것이 아니다. 떠나는 것 말고는, 그것이 그에게 어떤 고난과 역경을 가져올지 짐작도 못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말하자면 난민이 된 것인데,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발적’이라고 표현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난민이란 모두 자발적인 동시에 비자발적인 사람들 아닐까? 펠리시아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할 겨를 없이 무자비한 여정에 던져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떠오르는 질문도 그래서 ‘그다음 여정은?’이다. 소설은 끝났는데 펠리시아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어둡고 불길한 예감과 인류애적 자비가 뒤섞인 속에서 질문을 던진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일랜드 소녀는 길 위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동안의 과정을 ‘좋았던 여행’으로 추억할 힘은 없어 보인다. 섣불리 고통의 치유나 희망을 말하지 않고 그저 그날그날 닥쳐올 알 수 없는 여정을 스산하게 바라볼 뿐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옆에 독자를 세워 두는 마력을 발휘한다. 사실 읽는 동안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신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여행이 아니라 여정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끝나도 끝나지 않기에.
이 작품을 사이코 스릴러 장르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누가 진짜로 미쳤고, 누가 누굴 쫓고 있는 것인가라고 내게 묻는다면 쉽게 답하지 못할 것 같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라는 선명한 역사적, 사회적 대비 위에 다양한 광기가 섞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뿐.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알고 나면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겠지만, 작품은 이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가부장적 폭력과 착취, 실업과 극빈, 종교적 맹신과 범죄에 대한 불안은 지금 여기서도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니까. 그래서 더 서늘하고 책을 덮기가 두렵다. 책을 덮어도 여정은 계속될 테니까. 펠리시아는 피해자인가?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단지 펠리시아의 옆에서 나도 같은 곳을 바라볼 뿐이다.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라는 물음을 눈에 담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