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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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보다 섬뜩한 현실의 초상. 남미 전통 미신과 주술 의식, 부조리한 세계가 공존하는 호러 소설집'


남미 작가의 호러 소설은 어떨까?

장르 소설은 호불호과 많이 갈리는데, 개인적으로는 호!호!호!호!인 사람으로... 큰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서운 걸 잘 못 봐서 혼자는 못 보지만...)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총 12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의 세밀한 묘사 덕에 나도 모르는 사이 주변 풍경 속에 내가 들어 가게 되는데(어두운 거리, 캄캄한 호텔 안, 빽빽한 숲 속, 기괴한 집 안…)…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소름이 돋는다. 뿐만 아니라 그 장면들이 잔상으로 남아, 아무렇지 않다가도 무섭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함을 줄 수 있는 고어한 장면들도 있어 평소 추리 소설이나 호러 소설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이라면 추천을 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해서 선혈이 낭자하는 잔인한 소설은 아니다.)


“우리들의 공포, 그것은 대부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공포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소설은 단순한 장르 소설로 보기는 어려운데, 기이한 현상이나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을 끄집어 낸다.

귀신이 나와서 '으악!'하고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게 아니라, 그 귀신이라는 존재(또는 기이한 현상)가 생기게 된 연유 자체가 더 잔인한 식이다.


이 책이 한국에서 출시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단편 덕분이 아닐까 싶은데 이 소설은 전신 화상을 입은 여성에 대해 이야기 하며 시작한다.

다툼 도중 남편이 몸에 불을 질러 전신 화상을 입은 여성이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며 다닌다. 그 이후에도 몇차례 여성이 남성에 의해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곳곳에서 봉기가 시작된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자살은 아니다. 불 속에서 있다가 함께 있던 여성들에 의해 구해지고, 치료 받는다.).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그 속에 선 화자가 느끼는 양면적인 감정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이 출판 된 시기가 2016년이라고 하는데, 절묘하게도 한국에서 역시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의 열풍(이런 표현 자체가 우습지만.)이 시작된 시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편집 자체를 페미니즘을 다룬 단편집이라고 볼 수 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여성혐오 사건을 비롯하여 사회에 불거지고 있는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집이다.


폐가, 검은 물 속, 어두운 숲 속…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흔한 소재로 흔하지 않은 글을 썼다. 읽는내내 시각 뿐만 아니라 촉각과 후각까지도 자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게는 '남미'를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점 또한 재미있게 다가왔는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 곳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 했다.


읽고나면 찝찝한 공기가 진득하게 들러붙는 책이지만 재미있다. 색다른 장르, 색다른 배경의 소설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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