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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월
평점 :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한일간의 역사 인식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인정되면 식민지 시기에 벌어진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식민지 수탈 등에 대한 사죄와 배상 청구의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해석의 문제가 사법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증거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홀로코스트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관련 기록이 있느냐” 또는 “사실관계가 의심할만한 구석이 없이 명백한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런 경우 기록이 아닌 생존자의 기억(증언)은 명백한 증거로 인정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히틀러의 명령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 가운데 세세한 부분의 오류를 지적하며 증언의 신뢰도를 깍아 내린다. 이러한 내용을 잘 표현한 영화가 바로 레이첼 와이즈의 “나는 부정한다(Denial)”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주장 역시 같다. 일본군이 개입되어 강제로 동원했다면 일본군의 명령서가 존재할 텐데 이런 명령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래서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개입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생존자들의 기억과 증언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임지현의 ‘기억 전쟁’은 이러한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생존자의 기억보다 문서의 기록이 우선시되는 실증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역사의 가해자가 역사의 피해자로 둔갑하게 만드는 기억 그리고 누가 더 큰 희생자인지를 경쟁하는 상황까지 복잡한 기억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기억전쟁’은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을 통해 반인륜적 비극의 기억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고 정의하는데 가해자였던 오스트리아는 자신을 나치의 첫 번째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던 폴란드는 나치와 스탈린주의에 의한 자국민의 희생을 더 강조하며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시킨다.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서는 우리에게 다소 불편한 주제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온전한 피해자인가?”라는 민감한 질문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정의하면 확고한 도덕적 정당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과도한 도덕적 정당성은 자책의 자리를 점점 좁게 만들고 자신의 도덕적 성찰을 어렵게 만든다고 충고한다.
저자는 식민주의 제노사이드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전후 세대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억의 책임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일본군 ‘위안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국제적 기억 연대가 가능하고 더 나아가 이런 비극의 역사적 반복을 막을 수 있다.
‘기억 전쟁’과 더불어 홀로코스트를 다룬 자전적 소설인 ‘운명’도 같이 읽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가 자신의 강제수용소 경험을 토대로 쓴 ‘운명’은 당시의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헝가리의 반유대주의는 최소한 홀로코스트의 방관자 내지는 소극적(?) 부역자였다. 같이 읽어보는 것도 ‘기억 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