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 민음인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그 산이 거기 있기에.”
    
1923년, 거듭되는 실패에도 또 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를 준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조지 리 멜로리는 답했다. 해발고도 8844미터,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두바이 버즈칼리파빌딩의 10배가 넘고 우리나라 63빌딩의 33배가량인 높이다. 눈 덮인 거대한 암석덩어리를 정복하겠다는 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에서 저자, 존 크라카우어는 “에베레스트에 가지 말아야 할 타당한 이유들은 너무나 많았다”고 말했다. 그곳에 오르려는 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에베레스트를 찾는다. 크라카우어 말마따나 ‘현명한 분별’은 ‘욕구’ 앞에 무릎을 꿇는다.

네팔인들은 ‘하늘의 여신(사가르마타)’이라 불렀고, 티베트인들은 ‘세상의 어머니(초모룽마)’라 했던 에베레스트가 최초로 측량된 때는 1852년이었다. 지상 최고봉임이 확인된 뒤 15개 원정대가 정복을 시도하고 24명 산악인이 목숨을 바친 뒤에야 정상은 인간을 허락했다. 1953년 봄,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의 첫 등정이 있기까지는 ‘욕구들의 패배’로 점철됐다. 40여년 뒤 1996년 봄, 에베레스트에 오른 스포츠 전문지 <아웃사이드> 기자, 존 크라카우어는 여전히 반복되는 ‘욕구들의 패배’를, 그리고 선량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한다. 비극의 전모를 스포츠지에 온전히 담기에는 모자라 내놓은 책이 바로 <희박한 공기 속으로>다.

애초 크라카우어는 ‘에베레스트 등정의 산업화’를 취재하기 위해 배낭을 꾸렸다. 1990년대 초반은 일정 요금을 지불하고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문제는 그런 방식의 등반대 구성이 너무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계획에 따라 몸을 만들고, 대원 간의 유대감을 키우는 기존 등반대와 달리 ‘등반고객’으로 이뤄진 경우에는 서로를 신뢰하기 어렵다. 크라카우어는 그 ‘심한 절연감’이 슬픔을 안겨줬을 뿐 아니라 등반대원 넷을 잃은 비극에 일조했을지 모른다고 썼다. 고객은 ‘무적의 가이드’를 신뢰하고 그들의 판단에 이의를 달지 말아야 했다. 철저히 고객이었던 크라카우어와 그 일행은 저산소증으로 판단력을 잃은 가이드 앤디 해리스, 돌아서야 할 때 돌아서지 못했던 대장 로브 홀 등을 제때 설득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곳은 에베레스트였다. 희박한 공기는 정상적인 판단과 신체활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기존 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는 곳, 열정과 무모함의 경계가 모호해져 사람들이 쉽게 오류에 빠져드는 곳이 에베레스트였다. 어쨌든 크라카우어는 살아남았다. 남은 자의 슬픔은 그 어떤 서사보다 웅장하고, 그 어떤 직물보다 촘촘한 말들로 다시 태어났다. 참담함과 절박함, 열정과 무모함의 기록을 하나하나 또렷이 남겼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담담한 문장들이 칼날처럼 내 마음을 파고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내 삶도 늘 열정과 무모함, 분별와 욕구의 경계에서 줄타기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산이 거기 있기에’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수많은 ‘멜로리’처럼, ‘꿈이 거기 있기에’ 오늘도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