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왔다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송경은 옮김, 김태권 부록만화 / 마시멜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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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재미없는 책이네.’


몇 년 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궤변’으로 느껴지는 말들로 가득한 책을 ‘그래도 다 읽어야 해’란 생각에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꾸역꾸역 다 읽긴 했다. 남는 내용은 없었다. 2010년대 한국 사람의 눈으로 1930년대 독일 사람들을 이해하긴 어려웠고. 


<그가 돌아왔다>의 인상도 비슷했다. 1945년 죽은 줄 알았던 히틀러가 2011년에 나타나 유튜브 스타가 된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해 기대를 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1인칭 시점으로 알게 된 히틀러의 머릿속, 그가 변해버린 세상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은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이 책은 돌아온 히틀러가 사람들을 어떻게 선동시키고 있느냐를 매우 불친절하게 설명했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나는 계속 ‘몇 페이지나 남았지’ 생각했다.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바가 이 ‘불친절함’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히틀러가 얼마나 매력적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에게 열광했고 추종했다. 


히틀러를 비판하는 <빌트지>와 그를 의심하는 ‘네오나치’들이 있긴 했으나 소용없었다. 한때 리모컨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정도로 TV라는 물건을 통 이해하지 못하던 히틀러는 그 TV속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을 사로잡는다. 자신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크뢰마이어의 할머니를 설득하고, 호텔 경비와 병원 직원들까지 감화시킨다. 그러자 정당들은 녹색당, 자민당, 사민당 할 것 없이 그를 영입하러 나선다. 결국 끝에 웃은 자 역시 히틀러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여론이 대개 그렇다. 우리는 별 대단한 이유가 없어도 환호하거나 분노한다. 여론이 달아오르는 일은 쉽다. 문제는 그 여론의 방향이다. 99℃까지 끓은 물이 1도 더 높아지는 순간, 이때가 중요하다. 이 순간의 방향이 ‘진보’를 가져온 것이 87년 6월 항쟁이라면, ‘인류 전체의 비극’을 낳은 때가 바로 히틀러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다>에서 묘사했듯, 21세기에 등장한 히틀러가 별 무리 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면…. 


이것은 지나친 망상일까?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세상은 너무나 흉흉하고, 사람들은 너무나 평범하다. 이 책과 함께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를 읽었다. 밀턴 마이어가 독일에 거주하며 나치에 가담했던 10명을 인터뷰한 내용들을 보면, 2차 대전의 잔혹극은 단지 히틀러라는 악마 혼자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커진다. 한 목수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발전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독재정치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어떤 사람한테 돈이나 기회가 없게 되면, '체제'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게 되는 거예요. 그때에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모두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신 총통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미국인께 감사드립니다.' 만약 공산주의가 대세라면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우리는 스탈린께 감사드립니다.' 사람이란 다 그런 거죠. 제가 자진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히틀러는 1930~40년대 독일인들이 무엇에 갈증을 느꼈는가를 잘 포착했을 뿐이었다. 다수의 동조와 침묵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졌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또 ‘그’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올 수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불길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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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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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2014년 마지막 달의 최대 이슈는 ‘땅콩회항’이었다. 사람들은 회항이라는 사상 초유의 갑질에 분노했다. 재벌 3·4세들이 검증 받지 않은 채 무혈입성하는 한국 재벌 특유의 문화 탓에 언젠가 터질 일이었다는 반응도 많았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행동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단지 ‘오냐오냐 소리만 듣고,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부잣집 딸’이라서? 이 설명은 누구나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2% 부족하다. 조현아는 괴물이 아니다. 한진그룹이, 오너일가가 만든 안하무인이 아니다. 그를 만든 것은 사회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약자들을 외면하며 정치적 권리를 소비의 권리와 맞바꿔버리는, 결국 ‘네 고통은 네 팔자’라고 말하는 우리가 또 다른 조현아다.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는 <세상 물정의 사회학>에서 그런 세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텔레비전이라는 현대의 예절학교에선 다양한 경력의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친다. 주름살과 뱃살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으니 수치심을 느끼라는 상업광고 선생님부터, 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인사하라는 공익광고 선생님,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매너를 가르치는 언론인 선생님, 틈만 나면 정체불명의 선진국 타령을 하며 학생들을 타박하는 정치인 선생님까지, 다양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살뜰히 보살핀다.


텔레비전 예절학교에 의해 수치심이 끝없이 속류화되면, 수치심의 영역은 점점 사소한 대상으로 축소된다. 우리가 '입 냄새'와 '떡진 머리'와 같은 사소한 수치심에만 예민해져 있을 때, '공금횡령', '불법상속', '논문 표절', '위장 전입'과 같은 짓을 한, 후안무치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사람들이 속류화된 수치를 가르치고 있다. 속류화된 수치에만 민감해진 문명화된 사회의 지독한 역설이다(본문 143쪽).”


수치심이 속류화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그 책을 덮고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인지,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이었기 때문인지(128쪽)” 묻지 않는다. 수치심이 사소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신만의 예외를 꿈꾸며”복권을 산다. “연대라는 단어를 살해한 사회(192-193쪽)”의 단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존엄의 회복을 위해 인정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땅콩회항’의 사무장은 예외였다. 본인의 고통어린 결단이 있기도 했지만, 그가 운이 좋은 편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사회에서 ‘부익부 빈익빈’ ‘1대 99의 사회’라는 표현들이 닳고 닳은 말이 되어가는 중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거침없고, 작은 성취를 좇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은 주눅 들어 있다. “오직 부만이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이기적 상식(220쪽)”은 한국 사회에 뿌리 잡은 지 오래다. 누구나 똑같은 한 표를 가지고 있다지만, 우리는 이미 절망하고 있다. 이건희의 1표와 나의 1표는 진짜 똑같냐는 의심을 좀처럼 접어두지 못하며. 


그래서 다시 ‘민주주의’란 단어를 곱씹어본다. <세상 물정의 사회학>이 ‘세속’을 묘사하기 위해 택한 26개의 키워드는 민주주의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모든 개인이 소중한 관심을 받는 품위 있는 사회, 공감에 제도의 옷을 입힌 복지사회, 연대가 지배하는 사회, 부동산 가격을 사수하는 패당이 아닌 이웃으로 살아가는 사회, 위험의 인식을 방해하는 관료들과 군중을 기획하는 ‘패밀리’를 교정하는 사회. 이 사회를 만드는 힘은 민주주의에 있다. “신분사회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135쪽).” 우리는 그런 사회를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오랫동안 잊고 지내지 않았을까.


http://sost.tistory.com/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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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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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현실의 간극, 그것은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예술의 현실도피인가? 순수문학파와 카프의 대립 이래 문학의 순수성과 사회성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달아오른 때는 1967년이었다. 불씨를 지핀 이는 젊은 평론가 이어령이었고, 거기 뛰어들어 몸을 불사른 이는 시인 김수영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8편의 글이 오갔다. 각각 문학의 순수 영역과 사회적 역할을 옹호하는 두 사람의 글은 화려했다. 그러나 끝낼 수 있는 논쟁은 아니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김수영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세 번째 미술에세이집 <고뇌의 원근법>에서 그는 몸집만큼 진중하게, 하지만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예술이란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일이라고, 예술은 정치적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고.

“왜 한국 근대미술은 예쁘기만 한가?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은데….” 그래서 서경식이 소개하는 그림들은 예쁘지 않다. 아니 추하다. 여인은 발가벗겨졌고, 찢어진 육신들과 붉은 피로 가득하다.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 전쟁. 그 어리석음과 잔혹함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철저히 꿰뚫어보고, 남김없이 그렸기 때문이다. 오토 딕스가 대표적이다. 이 독일 화가는 1,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전쟁 후 다시 붓을 든 그가 가장 많이 그린 인물 중 하나는 상이군인이었다. 팔다리가 없고, 얼굴은 일그러진 채 거리에서 구걸하는 상이군인에게 지나가던 애완견마저 오줌을 싸며 지나갔다. ‘조국이 부른다’는 부추김에 전장으로 달려갔지만, 전후의 혼란은 그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딕스는 이 주제를 반복해 그리면서 국가권력의 독단과 자본주의 사회의 무자비함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은 전쟁의 고통과 무서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딕스는 4년간 자신의 체험을 <전쟁>이라는 제목의 제단화(祭壇畵)로 담아내는 데 몰입했다. 이 그림은 출동하는 병사들, 처참한 전장, 파괴된 참호에서 동료와 함께 탈출하는 병사, 누워있는 자들, 이렇게 네 개 화면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그림이 제단의 밑 부분이라 순서대로 보면 꼭 시곗바늘 돌아가듯 원이 그려진다. 즉 이 제단화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무한히 계속되는 전쟁의 양상이 그려져 있다.

서경식은 독일 드레스덴 주립미술관 전시실에서 이 그림을 관람하던 다른 사람들에게 느낌을 묻는다. 여행 중인 형제는 그림이 “모든 인간에게 경고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너무 잔혹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드레스덴 주민은 “아름답진 않지만,” “전쟁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답한다. 딕스는 “모든 인생의 천박함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전쟁에 지원했다. 그는 영웅신화와 같은 전쟁의 낭만을 벗겨내고, 자신의 눈으로 본 전쟁, 즉 ‘악마의 짓’을 그림으로 고발했다. 불안이나 패닉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무서움을 전하고 전쟁을 저지하는 힘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딕스는 물론이고 이 책에 소개된 화가들은 대부분 생소하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참전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의 카니발’이란 이미지밖에 그릴 수 없었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다윗의 별’을 단 채 살아가야 하는 유태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가라앉은 색채로 표현한 펠릭스 누스바움. 그들은 전쟁과 학살의 시대를 꿰뚫어보았다. 그들에게 ‘전후(戰後)’란 없었다. 지금 발버둥치고 있는 추한 현실을, 삶에 가득 찬 고뇌를 그려내는 것이 그들의 예술이었다.

올해는 한국전쟁 61돌이다. 3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이 땅은 비극의 현장이었고,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쟁은 추상명사로, 기록으로 남아버렸다. 아니 기록으로도 제대로 남지 않았다. 전쟁영웅들의 동상과 장군들의 회고록으로 남았을 뿐, 무명용사들은 증언도 비목도 없이 산하에 누워있다. 광기와 잔인함, 고통의 증언과 기억은 쉽게 잊혀졌다.

전쟁미술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쁘기만’ 했던 한국 근대미술이 적어도 망각곡선을 가파르게 만들었으리라. 전쟁을 쉽게 잊은 사람들은 전쟁을 쉽게 말한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지만 적당히 넘어가선 안 된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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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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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거기 있기에.”
    
1923년, 거듭되는 실패에도 또 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를 준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조지 리 멜로리는 답했다. 해발고도 8844미터,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두바이 버즈칼리파빌딩의 10배가 넘고 우리나라 63빌딩의 33배가량인 높이다. 눈 덮인 거대한 암석덩어리를 정복하겠다는 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에서 저자, 존 크라카우어는 “에베레스트에 가지 말아야 할 타당한 이유들은 너무나 많았다”고 말했다. 그곳에 오르려는 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에베레스트를 찾는다. 크라카우어 말마따나 ‘현명한 분별’은 ‘욕구’ 앞에 무릎을 꿇는다.

네팔인들은 ‘하늘의 여신(사가르마타)’이라 불렀고, 티베트인들은 ‘세상의 어머니(초모룽마)’라 했던 에베레스트가 최초로 측량된 때는 1852년이었다. 지상 최고봉임이 확인된 뒤 15개 원정대가 정복을 시도하고 24명 산악인이 목숨을 바친 뒤에야 정상은 인간을 허락했다. 1953년 봄,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의 첫 등정이 있기까지는 ‘욕구들의 패배’로 점철됐다. 40여년 뒤 1996년 봄, 에베레스트에 오른 스포츠 전문지 <아웃사이드> 기자, 존 크라카우어는 여전히 반복되는 ‘욕구들의 패배’를, 그리고 선량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한다. 비극의 전모를 스포츠지에 온전히 담기에는 모자라 내놓은 책이 바로 <희박한 공기 속으로>다.

애초 크라카우어는 ‘에베레스트 등정의 산업화’를 취재하기 위해 배낭을 꾸렸다. 1990년대 초반은 일정 요금을 지불하고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문제는 그런 방식의 등반대 구성이 너무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계획에 따라 몸을 만들고, 대원 간의 유대감을 키우는 기존 등반대와 달리 ‘등반고객’으로 이뤄진 경우에는 서로를 신뢰하기 어렵다. 크라카우어는 그 ‘심한 절연감’이 슬픔을 안겨줬을 뿐 아니라 등반대원 넷을 잃은 비극에 일조했을지 모른다고 썼다. 고객은 ‘무적의 가이드’를 신뢰하고 그들의 판단에 이의를 달지 말아야 했다. 철저히 고객이었던 크라카우어와 그 일행은 저산소증으로 판단력을 잃은 가이드 앤디 해리스, 돌아서야 할 때 돌아서지 못했던 대장 로브 홀 등을 제때 설득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곳은 에베레스트였다. 희박한 공기는 정상적인 판단과 신체활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기존 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는 곳, 열정과 무모함의 경계가 모호해져 사람들이 쉽게 오류에 빠져드는 곳이 에베레스트였다. 어쨌든 크라카우어는 살아남았다. 남은 자의 슬픔은 그 어떤 서사보다 웅장하고, 그 어떤 직물보다 촘촘한 말들로 다시 태어났다. 참담함과 절박함, 열정과 무모함의 기록을 하나하나 또렷이 남겼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담담한 문장들이 칼날처럼 내 마음을 파고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내 삶도 늘 열정과 무모함, 분별와 욕구의 경계에서 줄타기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산이 거기 있기에’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수많은 ‘멜로리’처럼, ‘꿈이 거기 있기에’ 오늘도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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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 서양문학의 향기 10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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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있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 당신의 생각이 주위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제 스스로 자라나도록 두십시오. 그와 같은 성장은, 모든 진보가 그렇듯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뻗쳐 나와야 하며, 그 무엇에 의해서도 강요되거나 재촉당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산달이 되도록 가슴 속에 잉태하였다가 분만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상과 느낌의 모든 싹이 완전히 자체 속에서, 어둠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 속에서 완성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고 나서 깊은 겸손과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명료함이 탄생하는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이것만이 예술가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를 할 때나 창작을 할 때나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서는 시간을 헤아리는 일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 폭풍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오니까요. 그러나 여름은 마치 자신들 앞에 영원의 시간이 놓여 있는 듯 아무 걱정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여유 있게 기다리며 참을성 있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날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오히려 내게 고맙기만 한 고통 속에서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내가 모든 것이라고!

- 그러므로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당신의 아름답게 울리는 비탄으로 견디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멀리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당신의 주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의 영역이 이미 별들 바로 밑에까지 다다를만큼 커졌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 당신의 고독은 당신에게 아주 낯선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위한 의지처이자 고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고독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당신의 모든 길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소망들은 당신을 동행할 각오가 되어있고, 나의 신뢰는 당신과 함께합니다.

-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하는 사랑입니다.

- 고독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고독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택하거나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님이 점점 더욱 뚜렷해집니다. 우리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마치 그렇지 않은 듯이 스스로 속이고 행동할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고독한 존재임을 깨닫고 바로 그러한 전제 아래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게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물론 우리는 사실 현기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땐 지금까지 우리 눈을 위한 디딤판이 되어 주던 하나하나의 점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가까운 것은 더 이상 없고, 먼 모든 것은 한없이 멀게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에 앉아있다가 아무런 준비나 중간과정 없이 느닷없이 높은 산꼭대기로 끌려간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이것까지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용기입니다. ... 이 점에서 인간들이 겁쟁이였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크나큰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즉 '환각'이라고 불리는 경험들, 이른바 모든 '유령의 세계', 죽음 등 원래 우리와 가까웠던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매일같이 뿌리침으로써 우리의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것들을 감지할 수 있는 우리의 감각이 퇴화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 잘 훈련만 시킨다면, 당신의 회의도 당신의 훌륭한 특질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회의는 탐구적이 되어야 하고 비판적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회의가 당신의 무언가를 파괴하려 들면, 그때마다 그 무언가가 도대체 왜 보기 싫은 건지 회의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회의에게 그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시고, 회의를 시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회의가 파괴자에서 당신의 가장 훌륭한 일꾼 중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 당신께 바랄 것이 있다면 다만, 큰 믿음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그 웅장한 고독이 당신에게 작용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뿐입니다. 이제 그 고독은 아무리 몰아붙여도 당신에게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고독은 앞으로 당신이 체험하고 행할 모든 것들 속에 익명의 영향력이 되어 계속해서 그리고 묵묵히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몸 속에서 조상들의 피가 끝없이 움직이며 우리 자신들의 피와 뒤섞여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인생의 전환점마다 결정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외로움은 수많은 펜을 움직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밤, 희미하게 들리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덩그러니 남아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빛을 바라보며 남몰래 한 단어씩 써내려간 사람이라면 알 것 같다. 완벽하게 혼자인 순간, 비로소 새로운 이야기, 진심이 담긴 말과 글이 탄생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더 깊숙히 고독 안으로 들어가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릴케는 열 통의 편지에 걸쳐 마음 깊은 곳에서 글을 써야할 이유를 찾고, 자신을 울리는 외로움과 그로 인한 슬픔을 알아야만 모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릴케가 말하는 외로움은 결국 '구도(求道)'다. 보잘 것 없어보이는 일상, 단순한 열정이나 자연과 신에 대한 회의, 이 모든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퍼즐을 완성하는 일이 글쓰기다. 평생토록 짜맞춰야 하는 복잡한 그림을 이해하려면 어서 빨리 고독해져야 한다고, 고독이라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삶의 자세, 시를 노래하는 마음, 성장을 기다리는 법 모두 '외로움'이 출발점이라는 릴케의 이야기는 어느 면에선 원론적이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음 속으로 조용히 퍼져나간다. 사랑마저도 고독과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는 일이라는 릴케의 말처럼, 결국 고독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일까.

확신에 찬 아름다운 언어를 만나는 일은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다. 번역체 특유의 잦은 접속사 사용이 아쉽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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