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서 상, 중 하의 반을 읽은 지금 몰아보지 말 것을이라는 생각이 드는 책. 몰아서 보니 속된 말로 ...소설 같다. 차별적 언어라 차마 쓰진 못하겠군. 따로따로 보았다면 참 좋았을 작품이 몇 편의 불쾌함으로 인해 참 좋았을...까지 모두 희석되는 상황이라니. 시대적인 차이를 감안하고, 당대 대중소설임을 감안해도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끔찍하다 못해 잔혹해, 책임편집자인 미야베 미유키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작품을을 뽑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대 세이초의 독자가 남성이며, 남성 위주의 소설임을 감안하더라도 이 소설의 남자들은 탁월하게 역겨우며, 피해자인척 자기 말을 부풀리며,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탐욕스러우며, 성욕에 들뜬 악녀일 뿐이다. 난 여타까지 잘 살아왔어, 내가 잘못된 건 못된 여성들 때문이야. 그 여성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알겠고, 어떤 의미인지도 알겠는데, 그의 남성 주인공들이 책을 잡은 손에 힘을 주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듯.


역겹지? 역겨우라고 만들어진 인물 유형이니까. 그들은 비열하고 비도덕적이고, 탐욕스럽고, 나약하며, 일본 사회의 추악함을 응축한 인물이라고! 그러니까 역겨워도 참아야하고, 역겨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보이는 소위피코, 피해자 코스프레는 진짜 혐오스럽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려지는 여성캐릭터들은 너무나 음울한 악녀의 초상일 뿐이고, 자기 목소리 한 번 지니지 못한 바빌론의 창녀일 뿐이고. 진짜 피해자가 누군데 남성 화자를 피해자로 보이게 하는 구조란. 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해서 이리저리 마이너스 플러스를 하고 읽더라도 참......얼마 전에 읽은 짐승의 길까지 합쳐져서 한숨.


세이초가 왜 위대한 작가고 왜 지금까지 읽히는가를 깨닫게 된 것과는 별개로 몇몇 단편 빼고는 다시는 읽을 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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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 모으면서 반드시 읽은 책의 리뷰를 쓴다는 각오는 수십년; 동안 지켜진 바가 없고 꾸준히 뭘 운영하는 지구력도 없는지라 생각나면 인터넷 서점 리뷰란에 간단히 글을 남기는데, 이번 알라딘에 남긴 100자 평을 돌아보니 대부분이 번역과 교정에 대한 한탄이었다. 꼭 내가 무슨 트집 잡기 엄청 좋아하는 독자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책은 오타가, 이 책은 번역이, 이 책은 어디가 등등. 그렇게 예민한 편은 아니라 사소한 오탈자는 있어도 넘어가고 그게 책의 가치를 해칠 정도가 아니면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실수를 하는구나........싶은데 와서 별까지 달아가면서 남긴 책의 경우는 진짜 정도가 엄청나게 심해서 책을 읽다 건강 상 심대한 문제가 일어날까 겁이 나는 경우다.



1.


 


제의 책 1번: 줄리언 반스 <10과 2분의 1장으로 쓴 세계역사.>


줄리언 반스를 늦게 알게 되어서 줄리언 반스 책을 한 권 한 권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열린책들에서 나오고, 같은 번역자가 번역한 책은 포기하기로 했다.


일단 이름이 틀렸다. 퍼거슨 양이었다가, 휘거슨 양이었다가....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장편도 아니고 단편 소설에서 동일 등장인물의 이름이 다르다는 건, 솔직히 편집자가 교정하면서 책을 읽어보기나 했을까 의심이 드는 실수라 갑자기 책과 출판사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하락. 


사실 이름 바뀐거야, 뭐 그래 사람 실수니까...하고 넘어갈 수는 있지만 이름은 바뀌었고, 문장까지 꼬여있다면? 신뢰도는 수직낙하.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이 있다. 


"목적 달성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므로 프랭클린이 행한 또 하나의 첫 강연은 그의 조수에게 한 것으로, 자기들이 기억해야 하는 주요한 사실은 즐겁게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무슨 암호 해독인가. 읽고 또 읽어도 대체 이게 뭔 소린지 모르겠고, 이게 과연 한국말의 구문이자 어법인가하는 의심이 들고, 편집자는 이 문장을 읽어봤나하는 생각이 들고, 과연 번역자 본인이 번역한 것인지 학부나 대학원 학생들에게 번역을 시킨 것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고, 뒷부분도 저러면 대체 어떻게하나, 걱정으로 몸서리를 치고, 그런데 내용은 좋아서 읽기는 읽어야겠고........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음장을 넘기지만 이미 기대치는 한없이 낮아지고, 나도 모르게 아마존 원서란을 클릭하고 기타등등. 생각의 연쇄반응.


역시나 이건 아니야. 이건 너무하다고..........!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오는 문단의 번역 상태.


"당신의 삶에는 많은 거부 사항들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당신은 ......많은 것들을 부정합니다."
"오! 천만에요."
(중략)
"그렇습니다. 내 말은 전쟁이 무척 우려되었다는 겁니다. 전쟁이 있을 것 같아 보였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무언가 분별을 해냈습니다."
<무엇인가 분별을 했다!>


뭐가 우려되고, 뭐가 보여지고, 뭐가 분별을 해냈다는 건지. 번역기가 해낸건가. 게다가 저 어휘 선택. 번역기 돌려서 처음으로 나온 단어 뜻을 그대로 가져온 것도 아닐 텐데 과연 분별이라는 단어가 저기에 적절한지 생각이나 해봤을까.


문제는 저런 부분이 한 두 부분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어투로 말하는 건 이해를 하는데, 적어도 사람 답게 말은 해야지. 이게 1930년대 카프 문학도 아니고, 아니, 더 전으로 시계를 돌려서 이광수 무정도 아닌데 현대 인물들이 죄다 대화를 무정의 등장인물처럼 말하고 있다.설득하는 부분도 열띤 토론이나 행동의 권유가 아닌 부분에서도. 설마 우주의 신비로 1919년의 열린책들이 이 책을 펴낸 건가?


그래서 물론 나는 지금 섬에 있는 게 아니지요."
"오, 아니지요."
"상상했을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물론 보트도 존재하지 않겠군요."
"아니, 존재합니다. 당신이 보트를 탔지요."
"그러나 고양이는 하나도 타고 있지 않았지요."
"아니, 사람들이 당신을 발견했을 때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야위어 있었지요."


이광수 무정과의 비교는 너무 하다고? 무려 100년 전 소설인데? 이광수 무정의 대사 부분을 옮겨보면 이런 식이다. 


"불쌍하게 생각했지요" 하고 웃으며, "그렇지 않아요?" 한다. 오늘 같이 활동하는 동안에 훨씬 친하여졌다. 

"그렇지요, 불쌍하지요!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무론 문명이 없는 데 있겠지요―--- 생활하여 갈 힘이 없는 데 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병욱은 자신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중략) 

"우리가 하지요!


심지어 이광수 무정의 대사가 더 좋다. 이광수 선생님께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8월 쯤에 이 책을 샀는데 그 이후로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 구매가 멈췄다는 슬픈 현실. 내 돈 주고 좋은 책 읽으면서 이 책의 마무리 만듦새를 이렇게 만들어서 분노와 짜증을 겪어야 한다는 것도 화가 나고, 이 책이 다시 깔끔하게 수정되어서 나올 확률도 없어보이고. 


책 내용이라도 별로였으면 그냥 읽다가 던졌을 텐데 왜 이렇게 책 내용은 좋은 건지. 좋아서 더 안타깝다. 진짜 내용만 봐선 올해 제일 좋았던 책 중 하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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