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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평점 :
꽃은 알고 있다. 제목만 봤을 땐 식물도감인가, 자연과학이나 생태계에 관한 책인가 싶어 선뜻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일지’라는 책의 부제목이 관심을 끌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꽃가루들로 어떤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일까.
책을 펼쳐보니 의외로 추리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책의 저자는 영국의 식물학자, 화분학자이자 고고학자인 퍼트리샤 윌트셔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분야인 법의 생태학의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는 그녀는 자연이 우리에게 남긴 사소한 흔적들과 수십년간 쌓아온 과학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지난 25년간 살인, 강간, 납치 등 300건 이상의 까다로운 범죄 사건을 해결해오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수사물이나 추리물에서는 현장에 남겨진 단서들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 남겨진 DNA가 없거나, 목격자가 존재하지 않고 진술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해결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법의 ‘법의학의 여왕’이라 불리는 팻은 꽃가루나 포자, 흙 속의 균류를 통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팻은 사건현장 주변이나 피해자 혹은 용의자의 의류, 신발, 신체 등에 남아 있는 미세한 꽃가루를 분석하여 그의 행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수십 년 간의 분석을 통한 전문 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사건 당시의 상황이나 주변 환경을 생생히 그려내며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아나간다.
- 이처럼 자연은 우리의 온몸에, 몸의 안과 밖에 흔적과 단서를 남긴다. 우리가 환경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환경 또한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는 셈이다. 가끔은 단서를 얻어내기 위해 자연을 잘 구슬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게 자연은 언제나 비밀을 풀어놓을 것이다.
- 그곳은 용의자가 연인의 시체를 묻은 곳, 희생양이 꼼짝 못 하고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곳, 그리고 용의자가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그런 곳이다. 또한용의자가 언젠가는 사건의 진상을 드러낼 단서들을 가져온 곳이자, 자연이 다른 어느 것도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곳이다.
- 세상에는 미신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부리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이다. 20년 전이었다면 조앤의 사체는 백골이 흩어진 채 일꾼이나 혼자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우연히 찾아내기 전까지는 결코 발견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개척한 과학을 활용해, 우리는 자연이 살인범에게 남긴 미세한 흔적으로 그가 방문한 장소를 알아낸다. 살인자이든 아니든 우리는 흔적을 남기며, 지리적 풍경과 꽃가루를 비롯한 화분 화석, 균류, 토양에 관한 지식을 갖추면 흔적을 따라갈 수 있다.
- 조앤은 사랑과 희망, 두려움, 야망을 갖춘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편지를 읽으며 나는 깨달음을 얻었고, 평소에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휘몰아쳤다. 지적 도전이나 법의생태학을 발전시키며 내가 늘 지녔던 자부심보다도,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다. 사람의 감정은 이토록 소중하다.
일반적으로 접했던 수사물, 추리물과 달리 소설이 아닌 에세이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개별적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스토리가 나열되어있으면서도, 전반적인 작가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식물학, 화분학, 고고학 등의 여러 학문이 복합적으로 엮여져 만들어진 법의생태학을 이해하기 위해, 그 학문이 이름을 얻는데 까지의 그녀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고 흥미롭게 여겨지기도 했다. 학문이 직접적인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까지의 불신의 시선들을 넘어, 신중에 신중을 더한 세밀하고 폭넓은 노력들로 법의생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누군가는 자연이 지닌 신비함에 감탄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학문을 통해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말대로 인간과 자연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도 작고 사소해서 자연이 지닌 위대한 역할의 중요성을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다. 발길이 닿는 모든 곳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취들이 남겨지고 있을 것만 같다. 이제 나의 모든 한 걸음 한 걸음에 의미를 담아 되돌아볼 것 같다. 광대한 자연의 신비함을 느끼는 동시에 이 학문이 폭넓은 삶 속에 파고들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