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꽃은 알고 있다. 제목만 봤을 땐 식물도감인가, 자연과학이나 생태계에 관한 책인가 싶어 선뜻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일지’라는 책의 부제목이 관심을 끌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꽃가루들로 어떤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일까.

 

 책을 펼쳐보니 의외로 추리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책의 저자는 영국의 식물학자, 화분학자이자 고고학자인 퍼트리샤 윌트셔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분야인 법의 생태학의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는 그녀는 자연이 우리에게 남긴 사소한 흔적들과 수십년간 쌓아온 과학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지난 25년간 살인, 강간, 납치 등 300건 이상의 까다로운 범죄 사건을 해결해오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수사물이나 추리물에서는 현장에 남겨진 단서들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 남겨진 DNA가 없거나, 목격자가 존재하지 않고 진술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해결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법의 ‘법의학의 여왕’이라 불리는 팻은 꽃가루나 포자, 흙 속의 균류를 통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팻은 사건현장 주변이나 피해자 혹은 용의자의 의류, 신발, 신체 등에 남아 있는 미세한 꽃가루를 분석하여 그의 행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수십 년 간의 분석을 통한 전문 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사건 당시의 상황이나 주변 환경을 생생히 그려내며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아나간다.

 

- 이처럼 자연은 우리의 온몸에, 몸의 안과 밖에 흔적과 단서를 남긴다. 우리가 환경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환경 또한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는 셈이다. 가끔은 단서를 얻어내기 위해 자연을 잘 구슬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게 자연은 언제나 비밀을 풀어놓을 것이다.

- 그곳은 용의자가 연인의 시체를 묻은 곳, 희생양이 꼼짝 못 하고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곳, 그리고 용의자가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그런 곳이다. 또한용의자가 언젠가는 사건의 진상을 드러낼 단서들을 가져온 곳이자, 자연이 다른 어느 것도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곳이다.

 

- 세상에는 미신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부리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이다. 20년 전이었다면 조앤의 사체는 백골이 흩어진 채 일꾼이나 혼자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우연히 찾아내기 전까지는 결코 발견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개척한 과학을 활용해, 우리는 자연이 살인범에게 남긴 미세한 흔적으로 그가 방문한 장소를 알아낸다. 살인자이든 아니든 우리는 흔적을 남기며, 지리적 풍경과 꽃가루를 비롯한 화분 화석, 균류, 토양에 관한 지식을 갖추면 흔적을 따라갈 수 있다.

 

- 조앤은 사랑과 희망, 두려움, 야망을 갖춘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편지를 읽으며 나는 깨달음을 얻었고, 평소에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휘몰아쳤다. 지적 도전이나 법의생태학을 발전시키며 내가 늘 지녔던 자부심보다도,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다. 사람의 감정은 이토록 소중하다.

 

 일반적으로 접했던 수사물, 추리물과 달리 소설이 아닌 에세이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개별적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스토리가 나열되어있으면서도, 전반적인 작가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식물학, 화분학, 고고학 등의 여러 학문이 복합적으로 엮여져 만들어진 법의생태학을 이해하기 위해, 그 학문이 이름을 얻는데 까지의 그녀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고 흥미롭게 여겨지기도 했다. 학문이 직접적인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까지의 불신의 시선들을 넘어, 신중에 신중을 더한 세밀하고 폭넓은 노력들로 법의생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누군가는 자연이 지닌 신비함에 감탄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학문을 통해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말대로 인간과 자연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도 작고 사소해서 자연이 지닌 위대한 역할의 중요성을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다. 발길이 닿는 모든 곳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취들이 남겨지고 있을 것만 같다. 이제 나의 모든 한 걸음 한 걸음에 의미를 담아 되돌아볼 것 같다. 광대한 자연의 신비함을 느끼는 동시에 이 학문이 폭넓은 삶 속에 파고들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던져져 있다. 살아가고 있기도 하고, 어쩌면 죽어가고 있기도 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이름을 얻는다. 나는 여자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고, 취업을 준비해야만 하는 20대 중반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렇게 누군가가 정해놓은 이름 아래에서 살아가게 된다. 타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겁내곤 한다. 내가 가진 이름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남자를 사랑해야하고, 조신해야하고, 좋은 엄마가 되어야만 하는, 좋은 학벌과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아무튼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하는 사람이다.
 
 언어는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음과 양, 대상과 주체, 사와 공, 내향과 외향, 수렴과 발산, 감성과 이성, 몸과 정신, 남자와 여자. 옳고 그름으로 나뉜 삶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가 정한 정답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 속에서 두 가지의 범주에 들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쉽게 지워지기도 한다.
 
 홍승희의 에세이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에서는 지워져가는 누군가의 삶과 이분법적으로 나뉜 삶을 조명한다. 그녀는 비 독점 다자연애를 추구하고, 비건, 영페미니스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통령 풍자 그라피티 건으로 수용 생활을 한 경험이 있고, 스스로의 삶을 중단하려 한 적도 있으며 ‘이인증’이라는 정신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정말 그녀의 삶은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석되는 존재는 늘 해석당하고, 해석하는 위치에 서 있는 기존의 언어는 늘 말하지 못하는 존재를 해석한다. 16년이 지난 지금, 내가 나의 서사를 쓰지 않으면 읽히고 납작해지고 분류되어버린다는 걸 안다. 글을 쓰는 건 치열한 싸움이기도 하다. 두 가지의 싸움이다. 내가 나의 삶을 내 멋대로 편집할 수 있는 서사 편집권을 확보하는 일. 언어를 갖지 못한 내 언어를 드러내기 위해 기존 언어를 차용해 다른 언어로 뱉어내는 일. _157p
 

 우리는 언어로 누군가의 삶을 규정 지으려는 실수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순간 언어는 권력을 거머쥔 폭력이 되어버린다. 옳은 언어를 벗어난 삶과,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삶은 쉽게 비난받는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을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에겐 안다고 말할 자격도, 찬성하거나 반대한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누구나 그렇다. 그래야 한다. _135p


 사회는 저마다의 가치에 따라 무언가를 찬성하고 반대한다. 언어는 곧 권력이 된다. 그 권력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옳고 그른 것으로 나뉘어져 왔지만, 그 이분법적 사고에는 인생을 보다 쉽게 정의내리기 위한 ‘합리성’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찬성하고 반대하고, 강요하고, 배제할 수가 없다. 저자의 모든 의견이 나의 이념과 맞았던 것은 아닌지라 모든 면에 대해 공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 그에 대해 이상하다고 말할 권력과 논리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에 맞지 않고, A혹은 B로 규정될 수 없는 삶은 틀리거나 이상한 것이 아닐 테다. 그 무엇도 그래야 하고, 누구에게나 그래야 한다.



내 몸이 정말 내 몸인가. 아무리 저항해도 여전히 몸은 전방위적으로 압박받는 전쟁터다. 타투는 내 몸이 존엄을 외치는 방식이다. 몸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은 규격화되지 않은 몸의 자부심이다. 납작한 표준보다 낙인찍힌 몸이 낫다.
 
 최근에는 귀밑에 작은 아가미를 새겼다. 깊은 물에서 유영하기 위한 준비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몸에도 그림이 많아지고 있다. 검은 잉크를 먹은 캔버스 같은 몸들과 거리를 쏘다닌다. 규격화된 몸이 지배하는 거리에 균열을 보태고 싶다.
깨끗한 몸 말고, 더러워서 고유한 몸으로. _212p
 

 저자와 마찬가지로 내 몸에는 여러 개의 타투가 새겨져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타투이스트인 까닭도 있고,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새겨져 있을 타투를 통해 나의 존재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타투를 새긴 후에 놀랍게도 내가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말은, ‘웨딩드레스는 어떻게 입으려고 하냐’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비혼 주의자이다. 결혼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어본 적도 없으며, 그냥 언젠가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키워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나의 삶은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말은 ‘여자 몸에 그런 걸 새기냐.’는 것이었다. 조신해야하는 여성의 몸에 새겨진 타투는 ‘문란’의 징표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최근 여성의 인권과 수많은 이슈를 지켜보고 있자면, 아니 그 속에서 존재하고 있자면, 변화하고 있는 세상이 새삼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타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낸 순간 또 다른 가해를 당하고, 비난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만의 삶을’ 위해 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책 속 작가의 말처럼,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권위는 오직 당신에게만 있을 테다.
 



 당신이 너그럽지 않으면 좋겠다. 가족이나 평화나 화해나 치유 따위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의 이름 말고, 맨발로 선 피투성이 인간이기를. 마다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무사히 살아있기를. 눈물과 비명을 계속 누수시켜 폭력의 세계를 고장 내버리기를. _167p
 

 우리는 타인이 정해놓은 삶을 위해 숨을 죽일 필요가 없다. 너그럽지 않아도 된다. 배려와 관용의 미덕에 대해 계속해서 교육받아 왔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을 향해야 한다. 이제는 규정과 비난을 벗어나 각자의 삶에 귀 기울일 때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책의 제목이 새롭게 다가왔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사실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일 테다.
 
 책 속에서는 마약과 동성애, 가부장적 사회, 진보적인 정치 성향, 수용소에서의 생활 등에 다루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용납되지 않을 주제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삶 그 자체일 수도 있을 테다. 작가는 그에 대한 자신의 수많은 상념들을 독자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다. 그저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 기록할 뿐이다. 그녀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지워져 왔던 것들에 대해, 타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뿐이다. 외면해왔던 것들을 마주하고,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삶이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아프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폭력의 언어로만 손 쉽게 규정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의 삶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일 년에 단 하루, 특별한 나의 날을 갖고 있다. 모든 이들에게 매년 한 번씩 거쳐 가는 그 날은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내 생의 시작을 알리며, 살아온 날에 대한 회고와 살아갈 날을 위한 축복이 존재하는 날. 생일이다.

나의 생일은 일 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그 언저리, 세 번의 계절을 지나 마지막 계절을 준비하는 '10월'의 첫 번째 날이다. 생일이 다가오고 있음은 곧 한 해의 종결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지만, 한 해의 끝을 떠올리며 지난 10달을 돌아보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한 해 끝자락의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오긴 하지만 늘상 새로운 기분을 들게 하는 날임은 분명하다. 눈을 뜬 순간부터 평소와는 다른 새로운 감정이 들곤 한다. 생일은 그 자체로 특별함을 지닌다. 그 특별함은 ‘어떤 누군가’만의 것이 아니다. <버스데이 걸>의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생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유명의 사람도 무명의 사람도, 키다리도 땅딸보도, 어린이도 어른도, 선인도 악인도, 모두에게 그 ‘특별한 날’이 주어진다. 매우 공평하다. 그리고 사안이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공평하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이 아닐까.

카트 멘시크가 그린 붉은 색채의 매력적인 그림들과 함께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버스데이 걸>에서는 지나치게 평범하면서도 기이할 만큼 특별한 스무 살의 생일을 맞이한 ‘그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생일날, 일을 대신해주기로 한 친구가 몸져누워 그녀는 평소와 똑같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함께 밤을 보내기로 한 남자친구와는 며칠 전 한바탕 다투었고, 밖에는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있다. 다친 적도, 아픈 적도 없던 매니저는 이유 없는 복통으로 병원에 가게 되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날이었으나, 요상하게도 평범하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매니저가 병원에 가게 되어 그녀는 매니저의 업무를 대신 담당하게 되었다.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사장이 있는 604호에 식사를 전달하고 오는 일이었이다. 매일 8시, 매니저가 반복해오던 일을 생일을 맞은 그녀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사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그녀와의 축배를 들며 평범하지 않은 말을 남겼다. 어떤 것도 거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곧 이어 평범하지 않은 선물을 건네주겠다고 말한다. 그 선물은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 그녀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미인이 되고 싶고 똑똑해지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그런 것은 만일 실제로 이루어져버리면 그 결과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 저는 잘 상상이 안 돼요. 오히려 감당을 못하게 되고 말지도 모르죠. 저한테는 인생이라는 것이 아직 잘 잡히지 않고 있어요. 정말로. 그 구조를 잘 모르겠어요.

스무 살의 소원.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으나 여전히 인생을 잘 모르는 나이이기에,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소원을 빈 그녀의 말은 공감이 가기도, 이해가 가기도 한다. 단순한 부나 미, 지식이 아닌, 남아있는 기나긴 인생을 바라보며 소원을 남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아직도 많이 남았기에 그 소원이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인생의 시작과, 성인으로서의 시작. 끝을 알 수 없는 앞날을 앞둔 그 특별한 시점의 소망이 얼핏 짐작이 가는 듯 하다. 그녀는 이후에 꽤나 깊은 울림을 준 한 마디를 남겼다.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단지 그것 뿐이야.

'스무 살'과 '생일'. 특별함에 특별함을 더한 날일 것이다. 특별함으로 무장한 그 날도,보잘 것 없이 지나가는 날도 나의 인생이며, 나의 날이다. 타인의 시간이 아닌 나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자신 이외의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애써 잡으려 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지극히 평범한 날도, 기이하게 특별한 날도 우리의 인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스무 살의 생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생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단 하루를 특별하게 보내려 해왔고, 또 보내왔지만 이상하게도 스무 살의 생일은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한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집에서 나름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막대하게 특별할 것만 같았던 그 날은 일상의 한 편으로 묻혀 흘러가버렸다.

일상 속 특별한 순간은 '스무 살의 생일'처럼 명확한 이름을 가진 채 다가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해서 매번 소중할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살아갈 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컬러 인문학 - 색깔에 숨겨진 인류 문화의 수수께끼
개빈 에번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빨간색, 분홍색, 주황색, 노란색은 여자 색
파란색, 초록색, 하늘색, 연두색은 남자 색"
 

  어릴 적 나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색에도 성별이 존재한다는 것. 갈색과 보라색 따위의 애매모호한 혼합 색을 마주한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이걸 여자색이라 해야 하나, 남자색이라 해야 하나..’

  답을 내리지 못해 끙끙 앓던 나는 결국 유치원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이건 여자색이예요, 남자색이에요, 냉정하고도 단호한 선생님의 답은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자색, 남자색이란 건 없어”

  6살 남짓한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어 그 이후로도 한동안은 계속 색에 성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 선생님의 명확한 대답이 정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무튼 그 때의 충격은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어릴 적 나의 그 요상한 구분 기준은 난색과 한색,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나의 일화는 개인적인 믿음에 기반한 것이지만, 사실 색은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다르게 해석되어오고 있다. 집단과 장소, 시대, 문화에 따라 달리 이해되기에 색은 역사 속에서 인문학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도서 ‘컬러 인문학’에서는 기본 색상 ‘빨주노초파남보’에 더해 분홍색, 갈색, 흰색과 검정, 금색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어원을 비롯해 색과 얽힌 무수한 이야기가 책 속에 담겨 있다. 역사의 한 켠에서 색을 만나며, 새로운 시각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성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꽤 오래 전부터 ‘여자분홍색, 남자는 파란색’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왔다. 이에 한 연구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색 선호는 생물학적인 진화의 결과라 결론 내렸다.

  파란 하늘은 좋은 날씨와 좋은 수원을 뜻하기에 선호 되었으며, 여성이 분홍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렵-채집 생활 속 빨갛게 잘 익은 과일을 찾아내는 능력에 따른 결과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여성과 남성 모두 가장 좋아하는 색이 ‘파랑’이었다는 실험결과에 대해, 유전자가 선택적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1918<브리티시 레이디즈 홈 저널 British Ladies' Home Journal>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었다.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념에 따르면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이,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이 좋다. 분홍은 좀 더 분명하고 강해 보이는 색으로 남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지만 파랑은 좀 더 섬세하고 얌전해보여 여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 당시 분홍을 남성적으로 보았던 이유 중 하나는 빨간 피와의 연관성 때문이다. 이 남자다운 색에서 나온 밝고 옅은 색은 당연히 소년들의 색이었다. 인도를 비롯해 다른 나라들에서는 좀 더 대담한 분홍이 소년들뿐만 아니라 성인 남성에게도 강한 남성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컬러 인문학 158p



  남성과 분홍색이라니, 색다른 조합이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우리의 지독한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나의 옷과, 내복, 장난감, 신발을 비롯한 모든 물건이 분홍색이었으나, 남자 아이들의 것들은 하나 같이 파란색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름의 반항을 띤 나는 분홍보다 파란색의 물건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늘 의문을 품어왔다. 왜 우리의 색은 정해져 있을까.  



  이는 1930년대부터 소녀와 여성들의 방향으로 광고를 진행한 결과이다. 1937년 ‘최초의 섹스 향수’로 알려진 ‘쇼킹 핑크’는 여성용 잡지 제목이 된 뒤 분홍색과 여성용 제품과의 연관성을 확립시켰다. 그 후 코스메틱과 의류, 영화계에서 변화가 일어나며 곧 여성은 분홍, 이라는 인식이 정립되었다.

  분홍에 대한 여성의 선호는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와 관계가 깊다. 어릴 적 나의 요상한 믿음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사회적 통념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색에 관한 지나친 고정관념은, 개인의 취향을 지워낸 채 일정한 프레임을 주입하는 듯 느껴져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미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및 기타 국가들의 여성운동가들이 그 관행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나, 그 연결고리를 끊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필자의 옷장 속은 검정색으로 가득하다. 머리색부터 가방과 신발, 핸드폰까지 온통 검정색일 뿐이다. 혹자는 이러한 면모를 보며 무섭다, 우울해 보인다, 칙칙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는 깔끔하다, 세련되다, 가끔은 섹시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색이 갖는 이미지는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토록 천차만별이다.

  역사 속에서 검정색은 죽음, 불행, 악마, 속죄, 애도, 긍지, 다산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가져 왔다. 중국에서만 해도 검정은 물, 북쪽, 수성, 겨울, 추위, 돼지, 밤나무, 수수, 정체 상태 등의 다양한 의미를 띤다.

  흥미로운 점은 예방접종을 하는 심정으로 검정을 바라보는 시각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생각과 비슷한데, 인도 부모들이 악령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들 눈 주변에 푸르스름한 검정을 칠했다고 한다. 검정을 ‘악령’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보호를 위한 색으로 여겼다는 점이 꽤나 흥미로웠다.

   이외에도 ‘검정’파트에서는 흑사병과 블랙 프라이데이의 어원이나,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 LBD)로 알려지게 된 칵테일 드레스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다. 악마, 어둠, 시기와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나, 여전히, 그리고 계속해서 필자는 검정색을 좋아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찰스 애덤스의 만화 <애덤스 패밀리>의 등장인물 웬즈데이 프라이데이 애덤스의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누군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문장이겠지만.

더 어두운 색이 나오면 그땐 검정을 그만 입을게. 



  색은 개인의 감정과 심리를 나타내기도 하고, 사회적 이미지나, 신분,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색을 통해 하나의 취향을 내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한다. ‘검정’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심도 있게 들여다 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늘 무수한 색들로 둘러싸여 있다. 핑크색 인형과 빨간색 립스틱, 하얀색 책상과 검정색 볼펜. 잠깐 둘러본 풍경도 색으로 가득차 있다. '컬러 인문학', 그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수많은 색들의 색다른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겉,짓,말 - 결코 시시하지 않은
유세윤 지음 / 김영사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녕하세요, 유세윤입니다. 이 책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세이란 듣고 본 것, 체험한 것, 느낀 것 따위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 산문 형식의 글을 말한다. 수필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우리가 늘 배워왔듯 체험이나 개인의 상념 따위를 중시하는 장르이기에 허구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과는 큰 차이점을 지닌다. 이러한 에세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거짓’을 뜻하는 페이크(fake)가 붙었다. 페이크 에세이. 색다른 형식의 글 속에서 유세윤은 허구와 진실, 한 없이 가벼운 장난과 생각보다 무게감 있는 진중함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화도 실은 그게 진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역사도 실은 그게 진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큐도 실은 그게 진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뉴스도 실은 그게 진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여태 믿어왔던 사실들이
모두 그게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 책은 시작부터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그 어떤 사실보다 더 진실되지 않을까?

-겉짓말 169p

               

 저자는 우리가 아는 그 유세윤이 맞다. 개그맨, 아티스트, MC, 코미디언, 뼈그맨, 개가수, 광고 회사 대표, 한 아이의 아빠, 수많은 수식어를 붙여도 어색함이 없는 그는 ‘유세윤’다운 유쾌한 책을 써내려갔다. 책 속에서는 유세윤을 설명하는 여러 이름, 그 모습 뒤에 숨겨진 비밀들과, 그가 행동해온 수많은 , 그동안 하지 못했던 무수한 들을 보여주고 있다. 흑역사로 남아 있는 중2병 영상에 대한 진실과,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힘겨웠던 군대생활, 음주운전 자수 사건, 광고회사의 실체 등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그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판단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책에는 특유의 재치와 유머가 녹아있다. 거짓이 가미된 그의 기록을 보고 있자면 한 편의 유머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책의 무게만큼 이 책에 담긴 내용이 한 없이 가볍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책 속에는 유세윤의 고뇌와 고충, 여러 감상과 상념이 담겨 있다.


 

 한 번은 친구들과 자그마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있던 20대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나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내 팬이라며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지금 술을 마신 상태라 사진은 좀 그렇고 같이 술이나 한잔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들은 그런 거 필요 없으니 그냥 사진이나 한 장 찍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기록되기보다

사람들의 추억이 되고 싶다.

-겉짓말 188p


사람들이 더 이상 나에게 웃어주지 않을까 봐
사람들이 더 이상 나에게 환호하지 않을까 봐

나는 사실, 많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나를 단련시키는 거였다.
웃어주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도록
환호하지 않아도 행복하도록
사람들이 봐주지 않아도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나는 사람들을 웃기는 나의 능력이 곧 사라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다시 나에게 물었다.


‘코미디는 꼭 웃겨야만 해?’
.
.
아니.

‘사람들을 웃기지 않아도 돼.
이제부터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자!'

-겉짓말 125~127p


 

 책 속에서는 코미디언으로서의 유세윤과,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 유세윤의 생각과 감정을 만나볼 수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감, 무서울 정도로 극악한 미디어의 이면, 대중 앞에 드러나야 하는 그의 직업과 그가 느끼는 외로움. 유세윤이 마주한 여러 상황과 그에 대한 감상이 책 속에 나타나있다. 

 


 특히나 그가 설립한 광고회사의 실체에 관한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화 <백 투더 퓨처>를 보고 타임머신을 만들고자 한 유세윤. 그의 광고회사는 사실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을 만드는데 드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들어졌다. 같은 목적을 갖고 모집된 직원들은 서로의 행복했던 과거를 돌아보고, 나누고, 응원하며,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타임머신 개발에 실패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말한다. 모두와 함께 행복한 과거를 만들어가고 있기에.


 ‘겉짓말’에는 한없이 웃기고 가볍기만 할 것이라 생각되었던 그의 삶의 묵직한 이면이 드러나 있다. 거창한 표현이나 대단한 철학이 들어가 있지는 않기에, 그의 묵직한 메시지가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왔다. 그는 유독 ‘행복’에 대한 고뇌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이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우리는 그 단어 안에 마음을 가둬버릴 필요가 없다. 행복에 대한 정답은 없다. 오늘 먹은 라멘이 맛있어서, 날씨가 좋아서, 좋은 노래를 들어서, 기분이 좋으면 된 거다. 오늘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어서 기분이 좋으니까, 오늘은 기분 좋은 날로 할거양!

 


“바다에서 많이 안절부절 하던데 그럴 필요 없어요. 파도를 잡아서 라이딩 하는 것만이 서핑이 아니에요. 바다에 들어가서 파도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그 모든 게 서핑이에요.”

나는 지금 삶이라는 바다 위에 떠있다. 나에게 딱 맞는 파도가 오면 잡아타면 되고, 놓치면 또 기다리면 된다. 영원히 놓쳐도 상관없다. 더 이상 안절부절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서핑 중이니까.

-겉짓말 139~140p



유쾌하면서도 묵직한. 그것이 ‘겉짓말’의 매력이다. 행복이라는 단어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기분 좋은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즐겁고 뜻 깊은가. 우리는 인생을 그다지 어렵게만 살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항상, 계속해서 삶이라는 바다 위에 떠있다. 모든 순간에는 의미가 있다. 그의 말처럼 잠시 멈춰있는 것도 인생이기에,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고, 행복할 수 있다. to be continu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