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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 앤드 엔솔러지
이서수 외 지음 / &(앤드) / 2025년 6월
평점 :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이 말에 담긴 감정을 설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한때는 다정한 말이었고, 어떤 때는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피를 나눈 자매이든, 마음으로만 이어진 사이든,
그 호칭 하나에 엉켜 있는 수많은 감정과 역할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는
그 복잡한 정서를 다섯 명의 여성 작가들이 각자의 언어로 풀어낸 앤솔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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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부터 다정한 소설일 거라 예상했지만,
읽다 보면 다정함 안에 녹아 있는 ‘어쩔 수 없음’과 ‘씁쓸함’이 함께 따라온다.
단순히 언니라는 호칭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삶과 감정, 상실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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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 작가의 글은 젠더적 감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뿌리박힌 여성들의 무게를 고요하게 그려낸다.
사회 속에서 자주 누락되는 여성의 서사를
차분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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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작가의 글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타임슬립의 몰입감을 준다.
역사 속 이름조차 남지 못한 여성들의 삶을 되살리는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 당시의 공기와 분위기가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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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작가는 유일하게 판타지적 요소를 활용한다.
이야기 속 언니들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감정의 조각들로 살아 움직인다.
치명적이고도 묘한 매력.
자매라는 관계를 경계와 애증, 의존과 해방의 복합적인 감정으로 재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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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작가는 관계 속 위로와 상실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사이가 가까울수록 말하기 어려운 감정들,
언니라는 존재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결코 작지도 않았던 그 시간들.
짧은 문장 안에 담긴 진심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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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밀 작가는 차별과 모순 속 여성의 위치를 조명한다.
그러나 목소리는 결코 날카롭지 않다.
오히려 따뜻하고 조용한 말투로,
차분히 여성의 존재와 그 의미를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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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에 남은 문장들
“하나의 단어가 유행하면 모두가 그 단어를 사용하고 때를 입혀 금세 낡게 만드는 시대적 경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어의 탄생에서 오염까지의 기간이 너무 짧았다.” (p.25)
“우린 돈이 없잖아. 아니 뭐 근데 그런 좋은 신문사 갈라면 서울대는 못 나와도 전남대는 나와야지. 더구나 여자는 시집가면 못 하는데 뭘.” (p.59)
“평창이라는 도시도 고인과 나의 관계도.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나는 우울한 음악만 골라 들었고 졸다가 이어폰이 귀에서 빠져 깰 때가 아니면 가족들하고 말도 섞지 않았다.” (p.95)
“룸메이트의 말을 흘려듣는 척 칫솔을 주섬주섬 꺼내던 나는 '천사'보다는 '언니'쪽에 방점을 찍었고, 그 사람을 스스럼 없이 '언니'라고 부른 룸메이트가 부러웠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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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방식으로 언니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다섯 편의 이야기.
분명 다른 목소리지만, 읽고 나면 놀랍게도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결로 이어져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누군가에게 언니였던 적이 있는 사람,
누군가를 언니라 부르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언니’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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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해져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책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언니였고,
누군가의 동생이었고,
누군가의 기억 안에서 그렇게 불렸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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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들이 끝난 후,
마음에 오래 남는 건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들이다.
그 말들은 비로소 이 책을 통해 풀려 나오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