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쫓아오는 밤 (양장) - 제3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수상작 소설Y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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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월 한 달 동안은 독서에 쏟던 시간을 글쓰기에게 양보했다. 하루에 정해진 양은 없어도 매일 자유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쉽지는 않았고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을 낸 모든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지는 나날이었다. 글쓰기 챌린지가 끝나갈 무렵 창비 소설Y 클럽 5기 소식을 접했고 내가 생각보다 여유롭게 독서하는 시기를 기다려왔다는 걸 실감했다. 마침 오늘 있던 약속이 취소됐고 한동안 평일에도 바빴던 시기를 감안해 오늘 책을 다 읽어나갔다. 가독성이 굉장히 좋은 책이라 읽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여러모로 암시하는 바가 많았다. 서평을 잘 쓰진 못해서 아마 감상평이 될 듯한 <폭풍이 쫓아오는 밤> 후기를 시작한다.

비가 올 것 같은 저녁에 이서는 아빠와 동생과 함께 낯선 장소에 와 있다. 그들은 캠핑을 하러 온 수련원에서 갑자기 인터넷 연결이 끊기는 곤란함을 겪고 아빠는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관리동으로 향한다. 아빠가 나간 방 안에서 이서와 동생 이지는 둘만 남아 고요히 자리를 지키지만 옆 숙소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떠들며 그들만의 세상을 즐기고 있다. 이때 창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리고 이서는 이지와 함께 바깥에서 안 보일 만한 장소에 숨는다. 소리 내며 다가오는, 동물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기괴한 모습을 한 ‘그것’은 옆 숙소의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습격한다. 이서는 여섯 살 동생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그것이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을 때쯤 아빠를 찾으러 밖으로 나선다.

한편 수련원의 또 다른 곳에는 수하가 있었다. 수하는 교회 사람들과 이곳 수련원으로 왔고 저녁이 되어 따분해지자 바깥을 걷다가 관리동 부근에서 피 묻은 흡입기를 줍는다. 피 묻은 물건이 심상치 않았던 수하는 약주를 한 관리동 직원에게 유실물을 전해주고, 이때 아빠를 찾아 관리동으로 온 이서, 이지 일행과 만나게 된다. 이서는 자신이 본 그 ‘동물 같(70쪽)‘은 것에 대해 관리동 직원에게 말한다. 직원은 “혹시 꿈 같은 걸 꾼 거 아니니?”(71쪽)라며 이서의 말을 믿지 않지만 바깥을 순찰하기 위해 관리동을 나선다. 관리동에 남은 이서, 이지, 수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과 마주한 관리동 직원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숨으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것이 ‘정확하게 관리실 2층을 쳐다보고 있었(78쪽)’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그것’과 이서 일행의 쫓고 쫓기는 관계가 계속된다. 숨을 곳을 찾아 수하의 교회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로 가지만 대학생 인솔자 중 한 명인 성광이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은 술 냄새를 따라오기라도 한 듯 단숨에 그들의 은신처를 찾아내고 이서 무리는 위기에 처한다. 이서는 ‘그것’과 대치하면서 자신의 ‘붉게 변해 일그러진 왼손의 화상 흉터(98쪽)’를 드러내고, ‘그것’은 자기 ‘얼굴 반쪽과 몸 곳곳을 덮은’ 흉터와 비슷한 이서의 팔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때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를 들은 ‘그것’은 숙소 바깥으로 단숨에 몸을 빼낸다.

총을 쏜 사람은 수련원 인근 개 농장에서 일하는 ‘박 사장’이었다. 그는 이서 일행에게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떨떠름한 태도로 요청을 받아들인다. 꿍꿍이를 숨기는 듯한 박 사장에게는 위험한 비밀이 있었다. 그는 어느 노쇠한 회장이 소유한 개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곳은 표면상 개 농장일 뿐, 사실은 회장이 아끼는 수집품인 ‘그것’을 관리하는 공간이었다. 박 사장은 회장에게서 그것에 관한 일화를 듣는다. 죄를 지은 사람만 잡아간다는 악마. ‘그것’은 악마였다. 그렇게 2년 정도 농장에서 일해오던 박 사장은 비바람이 미친 듯이 몰아치던 그 날 회장의 비서로부터 갑작스런 해고 전화를 받는다. 그가 전화를 받는 동안 악마는 자신의 사육장 창살을 휘어버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 사장은 이서 일행에게 이런 얘기를 하진 않았다. 이서와 수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수련원 차를 타고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박 사장은 그때까지도 ‘신고를 받고 들이닥친 경찰이나 전문 엽사들한테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저 괴물이 사살되어 버리는 경우(184쪽)’만 걱정하고 있었다.

이서와 수하, 박 사장은 악마를 한 곳으로 유인하여 총을 쏴 재기불능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서는 악마가 술에 이끌려 이동함을 깨닫는다. 매점에서 최대한 챙겨온 술병을 강당 바닥에 깨버리니 바닥이 술 냄새로 진동한다. 술 냄새에 이끌린 악마는 강당 앞까지 오지만 이서가 강당의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때까지 강당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강당에서 이서와 마주한 악마는 처음에는 이서의 반격에, 나중에 가세한 수하의 반격과 박 사장이 쏜 마취총에 잠시 정신을 잃는 듯 했지만 더 분노한 모습으로 일어서고 마침내는 이서가 던진 라이터의 불에 타 고통스러워한다. 이서와 수하는 박 사장을 이끌고 강당을 벗어나 다른 생존자를 찾게 되면 소리쳐 알려주자며 잠시간 흩어진다. 이서가 계곡 밑에서 정신을 잃은 아빠를 찾고 수하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올라왔을 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써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폭풍이 쫓아오는 밤>은 영어덜트 소설이라 그런지 고등학생인 이서와 수하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들이 낯설지 않았다. 몸은 성장해가지만 과거의 기억과 행동에 머물러 자라지 못하는 내면의 아픔이 안타까웠다. 더 행복해지자고 마법처럼 말하던 엄마는 지금의 아빠인 새아빠와 만나 재혼하고 이지를 낳는다. 이서는 열한 살 차이가 나는 동생 이지와 엄마, 아빠를 보며 ‘진짜 가족이구나. 저 셋은.’(103쪽)하고 느낀다. 어느 날 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이지를 챙길 새도 없이 잠이 들어버린 이서는 퇴근한 엄마와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 그리고 울고 있는 이지와 마주한다. 거기서 이서는 ‘목이 조여드는 느낌(113쪽)’을 받고 집을 나서려 하지만 엄마가 그런 이서를 붙잡고 드라이브를 가자며 함께 나간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서는 엄마에게 그동안 담아왔던 이야기들을 퍼붓는다. 이런 이서의 모습에서 나를 겹쳐봤다.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한꺼번에 터뜨리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이서의 엄마는 한쪽으론 이서를 달래고 다른 한쪽으로 운전을 하다가 음주운전 운전자의 차에 치여 운명을 달리한다. 이서는 찌그러진 차체에서 자신을 끌어 올리던 운전자의 술 냄새를 맡은 후부터 술 냄새가 기분이 나쁘고 역했으며 그 사건으로부터 왼팔에 화상 흉터를 얻는다. 그날 이후로 몸과 마음이 모두 상처투성이가 된 이서였다.

이서와 악마는 여러모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악마의 몸을 반쯤 덮은 흉터는 이서의 화상 흉터와 비슷하다. 악마는 이서를 공격하려다가도 이서 팔의 흉터를 보고 멈칫한다. 악마는 이서에게서 무엇을 읽어내려고 했을까.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악마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신화 속의 이야기처럼 전해오는 악마에 대한 추측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리저리 팔리고 고문을 당하고 술을 억지로 먹으며 사랑받지 못한 존재를 악마로 만들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악마는 박 사장을 고용한 회장의 수집품이 되기 이전에 어디에서 무얼 하다 온 존재인지 알 수 없지만 <폭풍이 쫓아오는 밤>을 환상문학처럼 보이게 만드는 큰 장치가 된다. 박 사장은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쇠약한 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농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회장은 ‘십 년은 젊어지기라도 한 듯 힘이 넘치는 것 같’(170쪽)은 모습을 보인다. 아마 그는 악마의 피를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먹으면 이렇게 손발에 힘도 차오(175쪽)’른다는 회장의 말에서 짐작하면 회장은 정기적으로 악마에게서 피를 착취함을 알 수 있다. 피를 뽑히거나 여러 상황에서 저항하는 중에 악마는 몸의 반쯤이나 되는 흉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이서에게 묻고 싶지 않았을까. 네가 겪은 아픔도 나와 같은 것이었냐고.

그럼에도 악마는 악마에 불과하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고 늑대와 곰을 합쳐 놓은 얼굴에 네 다리의 길이가 다 달라 걷는 모습조차 기괴하기 짝이 없는 외형.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인간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고 회장은 악마가 더 많은 사람(먹이)을 먹어 훗날 자신이 이 괴물의 피를 먹었을 때 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인터넷을 끊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만한 권위를 지닌 사람이라면 분명 수련원 부근의 인터넷을 막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학살의 현장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이서와 수하가 쌓는 우정과 우정이 쌓이면서 허물어지는 마음의 장벽도 인상적이다. 수하는 아빠로 예상되는 인물에게 학대를 당한 것으로 보이고 이서는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자신의 위치로 인해 타인에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서로의 상처에 가장 순수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이 둘은 결국은 맞잡은 두 손으로 각자의 마음에 자리를 내어 준다. 괴물은 이서와 수하가 가진 상처의 집합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안고 있는 트라우마는 그들에게 더 커 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밤이라 실제보다 더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71쪽)’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우연한 밤에 괴물이라는 트라우마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서와 수하는 성장한다. 마지막에 일상으로 돌아간 수하와 이서는 재회한다. 이제는 웃는 방법을 아는 이서와 다시 축구를 시작하는 용기를 낸 수하. 그 우연한 밤은 이 두 아이가 앞으로 마주할 다채로운 세상의 초석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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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창비청소년문학 112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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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쯤 신종플루가 발병했을 때 나는 중1이었다. 등교하면 선생님들이 계단마다 서 계셨고 그때마다 멈춰서 체온을 재야 했다. 그 관문을 모두 통과하면 그날의 학교생활이 가능했던 그런 시기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KF94 마스크와 같은 동그랗고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등교했고, 며칠에 한 번씩 몇 반의 누군가가 신종플루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내 일은 아니지만 언제든 내 일이 될 수 있는 두려움에 빠졌던 몇 달이었다.
신종플루가 어떻게 사그라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신종플루에 걸렸던 아이는 자기 이름이 다른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두려워했고 매번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 아이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리고 2019년 말, 또다시 도래한 전염병의 시대에 나는 취업을 앞두고 있었다. 코로나19가 2009년의 신종플루처럼 몇 달 안에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있다. 처음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했을 때 겁에 질려 직장과 집만 왔다갔다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답답해 보였을지 몰라도 불안에 떠는 것보다는 삶이 지루하고 혼자인 편이 나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니 마음이 병들어가는 것조차 몰랐다.
작년에는 아픈 가족을 떠나보냈다. 병문안은 갈 수 없었다. 병원에서 간병인 1명을 제외하고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전국적으로 그랬지 싶어 나처럼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가족이 여럿 되었을 것이다. 2022년이 되어서는 사실상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었고 그것에 해방감을 느꼈나면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확진자 수가 늘어났고, 나같은 겁쟁이는 더욱 겁을 내며 몸 사리기 바빴다.
<페퍼민트>의 세상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프록시모 바이러스라는 것이 세상을 뒤덮었고 그 후 몇 년이 지난 세상을 비추고 있다. 프록시모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전, 해원과 해일 남매는 부모님이 일을 하는 동안 시안의 집에서 시안의 엄마(해원과 해일은 시안의 엄마를 ‘이모’라고 불렀다.)와 시안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외국에 사는 막내이모를 보러 갔다가 프록시모 바이러스에 걸린 해원과 해일의 엄마는 계약직이라는 자신의 처지로 인해 바이러스 의심 증상이 있었음에도 이를 숨기고 일상생활을 계속해 나간다. 그렇게 해원과 해일의 엄마는 슈퍼 전파자 N번이 되었고, 해원의 가족은 신상이 털리고 고소를 당하며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기에 아무도 몰래 지방으로 도망을 간다.
‘1호’와 ‘슈퍼’는 뒤에 어떤 말이 오느냐에 따라 어감이 확 달라진다. 전파자라는 말이 왔을 때, 그리고 그 1호 전파자나 슈퍼 전파자라는 말이 나에게 해당했을 때 주어지는 무게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실제로 엄마 지인의 딸이 내가 사는 지방의 1호 코로나 확진자였다. 엄마의 친구는 지역 병원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병원 사람들의 따끔한 눈길과 친하게 지내던 이웃까지 날카롭게 돌아섰던 그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주변 친구들도 많이들 떠났다고 했다. <페퍼민트>의 해원 가족의 이야기는 현실의 엄마 친구가 겪은 일과 다르지 않았다.
해원과 해일이 매번 시안의 집에 들렀기에 프록시모 바이러스는 시안의 엄마에게 발병하고 뇌손상이라는 후유증을 남기며 시안의 엄마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6년이란 시간이 흐른다. <페퍼민트>는 식물인간 상태인 자신의 어머니를 간병하는 시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3인 시안은 같은 고3인 해원과 다른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보편적인 고3의 학생들이 고민하는 진학, 연애, 친구관계 등은 시안에게 먼 나라의 일이다. 교실 칠판을 바라볼 일도 없는 시안은 자신이 주번인지도 모를 만큼 간병만이 자신의 일상이다. <페퍼민트>는 시안과 해원의 파트로 나눠져 진행되는데 시안은 1인칭으로, 해원은 3인칭으로 서술되어 처음에는 시안의 입장에 공감이 되고 가깝게 느껴졌다. 보편적 고3일 뿐인 해원의 고민이 조금은 철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점차 해원의 파트가 늘어나면서 해원의 상황에도 공감이 되었는데 입시와 학원선생님으로부터의 은근한 무시와 압박 등 고3을 지나왔던 사람이라면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독자에게는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시안과 해원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안은 간병하는 삶에 지쳐있었고 해원의 탓이 아닌데도 모든 것을 해원에게로 돌리고 싶어한다. 해원은 고3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시안의 알 수 없는 태도와 식물인간의 된 이모의 상태를 알게 되며 혼란스러워 한다. 시안은 해원에게 엄마의 산소통을 잠궈 주길 부탁했지만 실제로는 시안의 아빠가 산소통을 잠그고 이를 해원이 막아서며 시안의 엄마는 다시 숨을 쉬게 된다.
간병에 지친 보호자가 환자의 목숨을 끊은 사례를 뉴스로 종종 접한다. 그런 뉴스를 접하면 살인은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호자를 탓할 수만은 없어진다. 간병인이 20년 넘게 환자를 돌보면서 간병이 자신의 몫으로만 돌아가며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때를 상상하면 환자의 목숨을 끊은 간병인을 탓해야 할지, 간병을 간병인의 몫으로만 남게 한 사회를 탓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시안은 마지막으로 해원을 만났을 때 영원히 죄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를 아빠를 말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그들은 카페에서 만나 페퍼민트 차를 마신다. <페퍼민트>의 제목이기도 한 ‘페퍼민트’는 시안의 엄마가 좋아하는 차다. 엄마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기에 페퍼민트 차를 우려 엄마의 입술에 묻혀주는 시안의 행동은 엄마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또, 엄마가 페퍼민트 차 맛을 느끼고 있을 것이란 기대감처럼 언젠가는 엄마가 일어나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러난다. 시안은 “서로의 영혼을 해칠 것이다.”라며 해원과 더이상 만나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서로의 영혼을 해쳤을지는 몰라도 해친 영혼이 아물어지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용서와 화해가 바로 페퍼민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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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양장) 소설Y
단요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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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찾아올 2057년이 소설과 같을까 상상하며 읽는 재미라기엔 조심스럽다. 오락적인 재미를 느끼기엔 삭막한 배경이다. 2022년 현재에도 계속 녹고 있는 빙하들이 <다이브> 속 2057년 서울을 만들었을 것이며 소설 속 3차 세계대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연상하게 한다. 어쩌면 소설의 그러한 배경을 만든 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일지도 모르는 확신이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내가 <다이브>를 읽고 정리한 키워드는 아래와 같다.
1. 사라진 언어와 관계들
2. 인권문제
3. 인물들의 애매한 비중과 감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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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라진 언어와 관계들
"이윽고 사람들은 만약 이상한 게 있다면 바로 그런 말 자체일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사람 한 명으로 내버려두지 않는 낱말들 말이다. 부모님이 그랬고 남편이 그랬고 아들이 그랬다. 낱말들은 청소기와 자동차가 그랬던 것처럼 물에 잠겼으며 어느 물꾼도 서울 밑바닥에서 그것을 건져 오지 않았다."(다이브)

세상에 절대 없어지지 않을 언어가 있다면 가족과 관련된 것이리라 생각했다. <다이브>에서는 이 절대를 비틀어버린다. 인간은 존재하지만 관계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개인으로만 남았다. 누구의 딸인 선율이 아닌 그냥 선율 그 자체로, 누구의 아들 지오가 아닌 채 살아온 산의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이라는 과거의 언어를 서슴치 않게 쓰는 아이는 그 또한 과거에서 온 기계 인간 수호뿐이다. 물에 잠긴 도시들, 물꾼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처럼 이것이 소설임을 깨닫게 하는 여러 요소들 속에서도 사라진 언어와 그로 인한 관계의 해체가 주는 현실감에 서늘해지곤 한다.


2. 인권문제
"채수호는 이렇게 살아 있는 걸 싫어해. 내 명의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아무것도 못 먹는 것도, 24시간 내내 깨어 있어야 하는 것도 싫어. 그런 사소한 차이를 쉼 없이 알게 되는 게 싫어. 엄마랑 아빠가 날 어떨 때는 딸 취급하고 어떨 때는 기계 취급하는 것도 싫어."(다이브)

수호는 살아있는 인간이지만 기계이기도 하다. 정신은 인간의 것 그러나 신체는 기계로 된, 소속이 불분명한 존재다. (다이브 세계에서는 그런 소속마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선율이 우찬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서울에서 건져낸 기계 인간인 수호는 아이콘트롤스의 최첨단 시냅스 스캐닝 기술로 다시 태어났고, 그것이 수호의 의지였는가 하면 당연히 아니다. 골육종으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수호를 다시 깨운 것은 수호의 부모님이었다. 시냅스 스캐닝 기술로 자신이 기계로 다시 태어난 것을 인지한 수호는 처음에는 못 해본 것들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잠시간 좋아했으나, 먹을 수 없었고 잘 수 없었고 그를 움직이는 것은 심장과 여러 기관들이 아닌 차가운 배터리 하나였다. 그런 차이에서 숨이 막혀가던 수호는 울렁거릴 속이 없는데도 속이 울렁거리고 망가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기계 인간인 수호 자신이 지금의 생을 마감하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더라도 수호의 부모님은 그저 기계 수호의 기억을 지우고 다시 태어나게 하면 그만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고자 죽은 인간의 생전 기억을 기계로 옮겨 부활시키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신체가 육체가 아니라 기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울렁거리고 망가질 것 같은 감정을 느끼는 수호는 정말 인간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다이브> 속 살아 움직이는 기계 수호는 사실상 두 번째였다. 첫 번째 수호는 결국 스스로 인간이기를, 기계이기를 포기해 몸을 던졌다. 수호의 의지에 반해 두 번째 수호를 만들기로 결심한 수호의 부모님은 그가 눈을 떴을 때 과연 어떻게 맞이하려 했을까? 리셋된 것과 다름 없는 두 번째 수호와 달리 그렇지 않을 부모는 이번엔 다를 거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쉽게 되살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을까.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부모는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식을 재단할 수 있다는 통념이 계속해서 수호를 되살리는 수호 부모의 모습에서 잘 드러났다. <다이브> 속 가장 섬뜩한 부분이었다.

3. 인물들의 애매한 비중과 감정선​
<다이브>는 2057년이라는 조만간의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몇 가지 경각심을 일으키는 괜찮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대외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대부분의 생활권이 산 뿐이라도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나름의 인류애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약간의 안도감이 든다. 선율, 지오, 수호, 경이 삼촌, 지아, 우찬, 유안 등 <다이브>속 인물들은 생생했지만 그만큼 개개인이 골고루 부각되었으면 좋았으리란 아쉬움은 남는다. 수호처럼 사연 있는 인물이 비중이 많을 수 있으나 <다이브> 자체는 수호에 의한 이야기란 느낌을 받았다. 평행세계가 있다면 그곳의 <다이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수호의 이야기를 지나 선율, 지오, 우찬 등 여러 인물의 이야기로 이미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정선 부분은 책 읽는 중엔 의문스러웠으나 막상 글을 쓰면서 보니 성격이나 성향차이일 수 있겠다 싶다.

​"노을을 보면 네 생각이 나서, 앞으로도 줄곧 그럴 것 같아서 그래. 너 없이 해가 지면 거기에 빈자리가 남을 것 같아서."(다이브)

목적을 달성하여 앞으로의 일을 선택해야 하는 수호에게 선율의 다정한 말은 분명한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선율은 여지껏 살아오면서 연령과 성별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처음 맞이했을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수호를 강렬히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차겠지만 나라면 고작 보름밖에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선율처럼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선율이라는 인물이 감정표현에 솔직하단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2057년은 나의 2022년처럼 감정이 무겁게 다뤄지는 세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순간의 감정을 숨길 필요는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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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축하드립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서점에서 2014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고른 후로 매년 4월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8년 수상집은 작년 힘든 시기를 함께 견뎌준 책이기도 하고요. 올해 2019는 행복한 매일매일을 함께 해 줄 동반자이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말 축하드리고, 일상에 한 방울 변화를 주는 작가님들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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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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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라는 말로는 형용하기 힘들 만큼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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